재경휘경 / 백합 그늘 아래에서
형. 재경 형.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시원스레 웃는 너를 보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만치 멀어지는 너는 마치 멈춰버린 영상 속 한 장면처럼 이질적인 웃음을 거두질 않았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내가 처음부터 갈망했던 것은 그런 네 순수한 웃음이었고, 그것이 오롯이 나에게만 보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부터 내 모든 것들이 어긋나기 시작했으니. 너는 알 필요도, 알아야 할 이유도 없다. 그저 너는 지금처럼 나를 보면 돼. 휘경아. 구두굽이 바닥에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었다. 그와 동시에 멀어지던 네가 멈춰서고, 나는 네 바로 앞에 다가갔다. 부드럽지만 야윈 볼을 만져 본다. 사랑스러운 내 동생. 영원히 아무것도 모른 채 백합처럼 고고히 내 곁을 지킬-
나 사실, 알고 있어. 형이… 첫째 형을 죽였다는 것도.
우리 송이를, 형이 죽였다는 것도.
아무것도 몰라야 할 내 소유물. 희고 깨끗한 얼굴에 피눈물이 흐르고, 양 손에는 족쇄가 채워진다. 그와 동시에 네 자체가 핏물이 되어 순식간에 녹아내리고 만다. 뺨을 만지던 손에 남은 것은 새빨간 피. 핏물은 요동치고, 이윽고 한유라의 새빨간 입술로 변한다. 재경 씨, 당신이 자초한 일이야. 당신의 형을, 당신의 아내를, 나를, 도민준을- 그리고 천송이를. 당신이 그 손으로 다 죽였어. 당신한테 남은 게 뭐야? 휘경이? 그렇게도 사랑해서 직접 망가뜨린 당신의 소중한 장난감 보물?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그대로 못이 되어 내 고막을 찌르고, 나는 주먹을 쥔다. 새빨간 입술은 모래로 변해 움켜쥔 손 사이사이로 흩어져 내려가고, 고개를 숙이면 핏물은 온데간데 없다.
휘경아. 어디 있어? 휘경아, 이휘경. 어디로 간 거야? 사랑하는 내 동생, 내게 하나뿐인, 내가 유일하게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던 내-
이재경 x 이휘경
백합 그늘 아래에서
준희
"…형. 괜찮아?"
흐린 시야에는 휘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재경은 멍하니 휘경의 흐린 얼굴을 바라보며 느릿이 눈을 깜박였다. 꿈이었구나. 평소의 재빠르고 빈틈 없는 모습과 달리 한없이 풀어진 듯한 재경의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는 듯 휘경이 눈웃음을 지으며 재경의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내리고 다니면 더 인기가 많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휘경이 아직까지 아무런 말도 않는 재경과 시선을 맞췄다. 아무리 주말이라도, 점심 시간이 다 됐는데 일어나질 않길래 와 봤어. 그런데 이상한 꿈이라도 꾸는 거 같길래. 걱정을 담은 휘경의 목소리에 재경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그래, 분명 꿈이었다. 꿈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종종 죽은 사람의 환영을 보며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지만 그 안에 휘경이 포함될 일은 전혀 없었기에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듯했다.
"고마워. 좀, 안 좋은 꿈을 꾸고 있었거든."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 거 아냐? 좀 쉬어도 좋을 텐데."
"이 정도로 쉴 순 없잖아. 그리고, 나보단 네가 더 힘들 거고…"
재경의 말에 휘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원래 마른 아이였지만 천송이가 도민준과 동반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휘경은 눈에 뜨일 만큼 말라버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럴 만도 했다. 약 13년을 바라보고 사랑한 천송이가, 도민준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다 못해 같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고 말다니. 비단 휘경 뿐만이 아니라 연예계와 네티즌들에게도 어마어마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물론 도민준과의 연애 사실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유라를 자살로 몰고갔다는 누명에 목이 졸려 괴로워하던 탑스타의 안타까운 죽음은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덕분에 도민준의 죽음은 철저하게 묻힐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두가 휘경이 천송이를 따라가지 않을까 걱정하던 것과 다르게 이를 악물고 살기를 결심했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것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휘경의 순애보를 알고 있던 모두가 그를 걱정했다. S&C 그룹의 장남에 이어 막내까지 잃는 것은 아닐까, 주변의 모두가 휘경을 예의 주시했지만 휘경은 생각보다 씩씩하게 이겨나갔다. 적어도 그들의 앞에서는. 휘경이 유일하게 제 속내를 보이는 것은 하나뿐인 형 재경, 그리고 가장 친한 친구 유세미의 앞에서만이었다. 세미는 그런 휘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천송이의 자살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지울 수 없었는지 본인 역시 힘들어하곤 했다. 휘경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세미보다는 재경에게 더 많이 제 감정을 표현했다.
재경은 또다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휘경의 큰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한 마디에 금새 이렇게 되어버린 사랑스럽고 가련한 동생은 자신이 원하던 형체없는 그 무엇이 드디어 제게 선물처럼 다가온 것 같았다.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착한. 그것이 동생이라는 형태로 재현된 것은 매우 안타까웠으나 그렇다고 그것이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 동생과 형이라는 관계는 오히려 쓸모있기까지 했으니. 재경은 본인이 일어나는 대신 제 앞머리를 정리해주던 휘경의 손을 잡아 당겼다. 별다른 저항 없이 휘경이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촘촘이 눈물이 고인 휘경의 눈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고, 재경은 그런 휘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다는 표정을 한껏 드러내면서.
"…아직도, 많이 힘들어?"
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글픈 미소를 지을 뿐이다. 하지만 재경은 처음부터 대답을 들으려 한 것이 아니라는 듯 가늘고 긴 휘경의 손가락을 감싸 잡은 채 쓰다듬었다. 여전히 재경의 오른손 검지에는 서슬퍼런 못 반지가 끼워져 있다. 촘촘이 젖은 눈가와 대조적으로, 휘경의 동공은 텅 비어있었다. 그 동공이 재경의 반지를 담는지, 혹은 자신을 향한 재경의 호의를 담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재경은 자신에게 이리도 얌전히 반응하는 휘경이 못내 사랑스러웠다. 글쎄, 사랑이라 정의하기엔 복잡하고 배덕이 넘쳐 흐르는 감정이었으나 재경이 이를 자각하더라도 부정할 리는 없었다. 재경은 그대로 잡은 손을 당겨 휘경을 제 품에 안았다. 마치 힘들게 중심을 잡아 세워둔 기둥이 단 한번의 손짓에 그대로 무너지는 것처럼 휘경이 품에 안겨들었다.
"괜찮아. 휘경아.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아."
가운의 어깨 자락이 조금씩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재경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문은 닫혀 있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재경이 날개뼈가 도드라진 휘경의 등을 쓸어내렸다. 확실히, 한국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말랐다. 마치 진짜 날개가 돋아났던 흔적처럼 툭 튀어나온 날개뼈를 농밀히 쓰다듬으며 재경이 다른 손으로 휘경의 머리를 토닥였다. 아마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런 재경의 스킨쉽에 의문을, 혹은 본능적인 거부를 느꼈을 것이 당연했으나 가까스로 제정신을 유지하며 자신도 모르게 온기와 관심을 갈구하던 휘경에게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휘경의 속은 이미 금이 가다 못해 부서진 지 오래였으니. 그런 틈을 파고들어 온전히 자신의 취향으로 견고히 붙여나가며 재구축하는 것이 바로 재경이었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제 품에 안겨, 하나뿐인 생명줄을 잡듯 제 옷자락을 그러쥐고 바들바들 떠는 휘경의 모습에 만족한 듯 재경이 웃으며 제 품에서 휘경을 살짝 떨어트렸다. 누가 봐도 안쓰러우리만치 눈물을 머금은 얼굴을 내려다보던 재경이 그대로 휘경에게 입맞췄다. 휘경 역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저항할 기력도, 그래야 할 이유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둔해져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이에 더욱 만족한 듯 재경이 익숙하게 휘경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제 혀를 밀어넣었다. 그와 동시에 휘경이 바르르 떨면서 옷자락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마 자신도 조금은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어긋나 부서져버린 자신과, 그런 자신을 주무르는 재경의 존재를. 하지만 휘경은 더이상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둠이 휘경을 조금씩 좀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