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정서준 / 어떤 날도, 어떤 말도
함께 했었던 많은 계절은
비록 여기서 끝이 난다 해도
실 종 느 와 르 M
반 효 정 x 진 서 준
W . 준 희
효정아. 서준이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었다. 엄지손가락이 이미 낡아버린 사진을 또다시 훑었다. 사실은 사진이라 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다이어리 사이에 끼워져 구겨진 종이였다. 잊었다 생각했고, 잊으려 했던 기억이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잊혀지지 않은 기억이었다. 또다시 울컥하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서준은 눈을 감았다. 입술을 짓씹듯 깨물었다. 눈을 감으면 효정이 피를 토하며 눈을 감는 순간이 그려졌고, 눈을 뜨면 효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응시해야만 했다. 그 사실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서준은 가끔 창문을 타고 넘어와 부서지는 햇볕마저도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아무도 너를 몰랐을까, 효정아. 왜 누구도 너를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을까. 효정아. 왜 나는 너를 다시 돌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효정아, 효정아. 차마 꺼두지 못한 모니터에는 여전히 CCTV에 찍힌 효정의 옆모습이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HOME. 서준과 효정을 이어주던 단 하나의 실이었다. 서준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 … 네가 부끄러웠던 게 아니야.”
네가 두려웠던 것도 아니야, 효정아. 떨리지만 담담한 목소리가 고해성사를 하듯 느리게 흘러나왔다. 서준은 그렇게 효정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찾아올 줄 몰랐으니까. 너는… 너는, 내 과거였으니까. 과거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너를 돌아보면 내가 다시 과거로 빨려들어갈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웠던 거야. 우습지만 그랬어. 서준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바보같지. 효정아. 목소리 역시 입꼬리처럼, 조금 더 떨렸다. 고개를 기울인 서준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이내 반 박자 느리게 다시 모니터로 올렸다. 여전히 모니터 속의 효정은 무언가에 쫓기듯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여기 한 번만 봐주면…… 좋겠다. 서준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시야는 희뿌옇게 일렁이고 있었다.
효정아. 알고 있어? 넌 그 지옥같던 시궁창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어. 알아. 그때의 우리는 결코 진창 속에서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너는 반짝거렸기 때문에 홈에는 그렇게 하나둘 사람이 모였던 거야. 서준이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박였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펼쳐둔 다이어리 내지 위에 눈물이 얼룩졌다.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결코 자신은 본 적 없던 어느 날의 효정이 스쳐 지나갔다. 홈의 아지트, 누구도 떠나지 않는 그 곳 안에서 그제서야 모든 두려움을 뒤로 한 채 밝게 웃는 아이들, 그 안에서 누구보다도 더 환하게 웃으며 제가 가족으로 맞이한 아이들을 보듬는, 맘. 반효정. 어린 나이에 스스로 아이들을 제 품 안에 감싸려 했던, 사실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던 열 아홉의 소녀. 그리고 결국 제가 하려던 일 하나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진 스물 하나의, 내 소중한. … 소중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이 떨렸다. 서준은 한 손으로 우악스레 제 눈을 부볐다. 그래도 살지. 조금만 더 버텨서 살지. 그래서, 네가 추천서 써준 홈의 아이들이 쉼터에 들어가는 모습을 네 두 눈으로 직접 봤어야지. 효정아.
효정이 죽었다는 사실을 슬퍼하기도 전에, 홈의 아이들은 경찰서로 끌려가 이것저것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다만 수현이 제 일처럼 아이들을 도와준 덕도 있었고, 더 이상 아이들을 과거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효정의 다짐처럼 꼬투리를 잡힐 만큼 나쁜 일을 한 아이들이 없었기에 참고인 조사라는 명목의 취조는 다행히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끝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홈의 아이들은 동우, 아니, 박사와 시인, 그리고 맘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아지트를 떠났다. 아이들의 임시 거처는 대영이 손을 써 마련해 주었다. 임시 거처라고 해 봐야 대영이 아는 보육원의 여원장이 아이들의 향후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잠시나마 공간을 내어주기로 약속한 것이었지만, 갈 곳이 사라진 아이들은 기꺼이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아이들이 영원히 그 곳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준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시금 눈가를 꾹, 누른 서준이 가는 숨을 토해내었다. 이번에는 서준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였다.
나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어.
널 오해하기만 했단 말이야.
서준은 원래 자리에 사진을 다시 끼워놓은 채 다이어리를 덮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목걸이를 제 목에 걸었다. 효정이 그녀에게 주었던, 여느 펜던트 대신 그 열쇠가 흔들리는 목걸이였다. 열쇠를 잠시 손 안에 꼭 쥐며 시선을 내리깔던 서준이, 이내 손을 내려 책상 위의 녹이 슨 상자를 양 손으로 집어들었다. 나 때문에 변하고자 한 너였잖아, 효정아. 그러니까 네가 하려던 일의 마무리는, 내가 지을게. 보고 있어?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시금 톡,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에 떨어진 눈물에 상자가 가볍게 몸을 진동했다. 그 상자를 소중히 품에 안은 서준이, 몸을 돌려 모니터 안의 효정을 등졌다.
“…… 효정아.”
모니터를 등진 채 서준이 나지막이 이름을 되뇌였다.
“…… 미안해.”
그러니까, 쉬고 있어. 효정아.
“…… 보고 싶다….”
떨리는 목소리 뒤에 지은 웃음은 이미 눈물에 젖어 흐리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제와서, 더이상 들을 수 없는 본인에게 미안하다 전한다 해서 그것이 정말 전해지기는 하는 것인지. 이것도 결국에는 다 자기만족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들리지도 않고 전해지지도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소리내어 말하는 것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듣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을 것 역시 알기 때문에. 그 날, 너를 모질게 외면했던 나였던 만큼, 이제는 그만큼 스스로 돌려받기 위해. 속죄인 걸까? 서준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속죄라 하면 속죄일 테지만. 서준은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방을 나섰다. 오랜 시간 한 화면만을 띄우고 있던 모니터도 홀로 남자 결국 까맣게 눈을 감았다.
감정. 속죄라 하기에는 복잡했고, 미안함이라 하기에는 가벼웠다.
어떤 날에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을 감정이었으니 어떤 말로도 완연히 표현되지 않을 테다.
그러니 혹자는 그 감정을, 차라리 그리움이라 표현할 것이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지만
짧은 이별일지라도 나는 못내 서럽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큰 하나
이미 버스는
끊기고 돌아갈 길 멉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걸어서 그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대의 마음으로 갈 수 있는 토큰 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부르튼 발은 상관도 않을 겁니다
이정하,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