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택 / 잊혀지지 않는 것에 대하여
1.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은 일부러 떠나온 날을 기억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택은 자신의 병실 안에 그 흔한 TV도, 달력도, 심지어 라디오까지도 두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같이 입원한 이들과 바둑을 두고, 그러다 침대 헤드에 기대 누워 음악을 들으며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택의 일과였다. 제 삼자의 눈으로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그 사이클을 스스로 선택한 택은 생각보다도 오래, 그리고 꿋꿋하게 시간을 흘려냈다. 원래 핸드폰이나 TV같은 전자 기기와 친한 녀석이 아니니 평소와 그렇게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택과의 연락을 이어가는 덕선과 동룡이 보기에는 그만큼이나 답답하고 또 속상한 모습이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택의 병실을 찾아가는 동룡은 그런 택을 위해 부러 더 크게 웃고 크게 떠들었다. 그럴 때마다 택은 여느 때처럼 고요하게 웃었다. 하지만 택이 아무리 예전처럼 웃어도 점점 더 야위어가는 어깨와 마른 뺨은 숨길 수 없었기에 덕선은 돌아오는 길마다 매번 울음을 참았다. 언니, 나 진짜 택이 볼 때마다 속상해서 죽을 것 같애. 어떻게 해. 언니. 그냥, 그냥 말해버릴까, 그럴 때마다 보라는 왈칵 화를 내는 대신 덕선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걔가 선택한 최선인 거야. 넌 괜히 참견하지 마. 걔는 지금 아주 열심히 견뎌내고 있는 거야.
2.
뇌종양이라고 했다. 아니, 걔가 뭘 했다고 뇌종양이에요? 얘 술도 거의 안 마시는 애예요. 담배는, 담배는… 담배는 그래도 그렇게 많이 피운 것도 아니에요. 근데 대체 얘가 무슨, 뇌종양이라뇨. 선생님! 다시 좀, 검사 좀 해 보시라구요, 잘못 보신 걸수도 있잖아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의사에게 따져대는 선우의 양 팔을 붙잡은 것은 다름아닌 택과 선우의 아버지였다. 이미 선우와 택의 어머니는 진주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은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고, 선우는 그런 제 어머니와 여동생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울컥하는 마음을 숨길 길이 없어 붙잡힌 팔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되잖아요! 하지만 격양된 시선이 제 아버지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선우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런 선우와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던 의사는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저희도 안타깝습니다, 나지막하게 중얼이며 자리를 피했고 선우는 망연자실한 표정과 함께 손을 떨궜다. 그러자 아버지 역시 붙잡았던 손을 거두었다. 선우의 내리깐 시선 끝에 그의 미세하게 떨리는, 그 떨림을 차마 감추지 못하는 제 아비의 손끝이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흐, 하는 울음이 절로 터져나와 선우는 손톱이 제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볼품없이 갈라지고 젖어든 목소리를 내었다. 알고, 계셨던, 거죠. 아버지. 엄마두요. 그러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울음소리를 내며 진주를 더욱 끌어안았고, 꿋꿋하게 참던 진주도 결국은 제 어미의 품을 파고들며 훌쩍거렸다. 하, 선우는 그대로 헛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뇌종양이라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왜 택이가. 순식간에 눈 앞이 뿌옇게 젖어들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한참이나 가만히 서있던 아버지가 짜내듯 중얼거렸다. 아빠가, 미안하다.
3.
천재 바둑기사 최택은 조용히 은퇴를 알렸다. 많은 이들이, 수많은 팬들이 그의 은퇴를 믿지 못하고 아쉬워했지만 택은 그 어떤 후속 입장 표명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자신의 자취를 지워버렸다. 선우와 덕선, 동룡의 친구들 중 그들이 택과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집요하게도 택의 향후 거취와 은퇴 이유를 물었지만 셋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예 입을 열지를 않아버리니 주변인들은 그저 사정이 있나보다 하며 결국 저들이 먼저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셋은 부쩍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론 의대생인 선우는 그 중에서도 빈도가 조금 낮긴 했지만, 적어도 덕선과 동룡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를 만나고, 선우와 택의 집을 찾았다. 덕선은 비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기념품이든 무엇이든 들고선 택과 선우의 집을 찾아갔고, 동룡은 택과 선우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나마 선우마저 없을 때 진주가 아무리 애를 써도 고요하고 음울하기만 한 집은 둘 덕분에 그나마 생기를 되찾는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가끔 텅 비어버린 택의 방에 셋이 둘러앉을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둘의 빈 자리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둘 없다고 이렇게 방이 커 보이냐. 동룡이 중얼거리면 선우는 무릎을 모아 앉으며 턱을 괴었고 덕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정환이한테는 말 안 할 거냐? 택이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지. 어차피 알아도 걔는 못올 거 아냐. 휴가 받을 때까지. 선우가 뒤늦게 입을 열었지만 덕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차피 걔도 정봉이 오빠랑 아줌마 아저씨한테 대충은 들었을 거야. 정 궁금하면 자기가 알아서 가겠지. 그리고 택이가 김정팔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랬어. 그러니까 너네도 하지 마. 절대로, 절대로. 택이가 특별히 부탁한 거야. 제발 말하지 말라고.
4.
택아. 우리 왔어. 오랜만에 시간이 겹친 선우와 동룡, 덕선이 택이 입원한 병실 문을 열었다. 택은 베개를 몇 개 받쳐둔 채 침대 헤드에 기대어 귓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야, 최택. 우리 왔대니까. 앞서서 들어온 선우가 가져온 과일들을 협탁에 올려놓고 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제서야 택은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 내려놓으며 선우와 다른 이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왔어? 미안. 서글하니 웃는 모습이 또 얼마 전보다 더 수척해져 있어서 아릿해지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덕선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이번엔 누구한테 꽂혔어? 협탁을 열어보며 어느새 수북하게 쌓인 CD들의 앨범 케이스를 찬찬히 살펴보던 덕선이 돌아오는 답이 없자 조금은 멀뚱히 택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자신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던 듯 금새 시선을 마주친 택이 애매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이번엔 누구한테 꽂혔냐니까. 왜 말을 안 하냐? 물으니 그제서야 아, 하고 웃었다. 이승환. 요즘에도 책 많이 읽고? 하긴, 여기서 그거 아니면 할 게 뭐가 있겠냐만은. 져지 주머니에 양 손을 꽂은 채 주변을 돌아다니던 동룡이 중얼거렸고, 택은 여전히 덕선을 바라보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룡에게 돌아가는 답은 없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그런 택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가 입술 안쪽을 지긋이 깨물었다. 야. 최택. 그러나 택은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덕선의 모습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다. 야, 최택 저거 또 덕선이한테만 신경쓰는 거,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장난스레 말하던 종룡의 말을 중간에 끊은 선우가 그대로 택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놀란 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선우를 정면으로 마주보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선우가 택의 어깨를 쥔 양 손에 힘을 준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 언제부터 소리 잘 안 들리기 시작했어. 덕선과 동룡이 놀라선 그대로 둘을 돌아보았고, 택은 결국 어설픈 웃음을 짓고 말았다.
5.
덕선아. 정환이는 아직 모르지. 나 여기에 있는 거. 나긋한 택의 물음에 덕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하는 아이였지만, 청력을 조금씩 잃어가며 택은 부쩍 사람의 얼굴과 눈을 주의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마 입모양과 표정으로 하는 말을 유추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우는 그런 택을 볼 때마다 괴로워 고개를 돌렸다. 의대생인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택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역시 선우였기에 그만한 아이러니가 없었다. 가끔 정환과 통화를 할 때마다 그가 택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느끼는 선우였지만 그럴 때마다 선우는 대충, 큰 병원에서 좋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며 잘 지내고 있노라고 대답했다. 그다지 심하지도 않다고. 오로지 선우나 제 부모님을 통해서만 택의 이야기를 듣는 정환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택의 부탁이었으니까. 택이 부러 정환에게만 그렇게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아는 것은 아마 덕선과 선우 둘 뿐일 터였다. 이유를 알기 때문에 더욱 답답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절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택의 부탁이었다.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형제인 녀석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6.
최택 어디있어. 휴가를 나온 정환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집도 아닌 선우가 다니는 학교였다. 과실에서 동기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던 선우를 무작정 끌고 나온 정환은 으르렁대듯 선우에게 날선 목소리를 내었다. 알아서 뭐하게. 걔 우리 교수님 계시는 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있어. 넌 휴가 나오면 집에나 갈 것이지 옷도 안 갈아입고 왜 여기로 오는 건데. 애써 무던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선우의 모습에 허, 기가 차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던 정환이 그대로 선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씨발, 내가 병신 호구로 보이냐? 니가 계속 그렇게 둘러댄다고 내가 아 그렇구나 할 줄 알았냐고. 어? 지랄하지 말고 최택 어디 있는지 말 하라고!! 정환의 고함에 과실 안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복도에 서 있던 학생들도 흘끔거리며 둘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환은 아랑곳않고 선우를 몰아붙이기에 바빴다. 입술을 짓씹던 선우는 대답 대신 제 멱살을 틀어쥔 정환의 손을 붙잡아 떨어트렸다. 야. 김정환. 사람들 보는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미쳤냐? 평소보다도 더욱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내가 말하면. 뭐. 니가 찾아가기라도 할 거냐? 그러면 씨발, 당연히, 그러나 정환의 말을 가로챈 선우가 서늘한 눈으로 정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택이. 생각보다 심각해. 청력은 거의 다 손실됐어. 우리가 갈 땐 웃는데, 어떻게든 웃는데, 그런데도 힘들어하는 게 눈에 다 보여. 니가 그런 택이한테 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너는 알고 있잖아. 왜 택이가 너한테만은 자기 어디 있는지 말 못하게 하는지. 너 거기 가면. 김정환. 택이 두 번 죽이는 거야. 넌. 이 개새끼야.
6-1.
꿈을 꾸었다. 정환에게 제 마음을 털어놓던 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정환아. 너야. 술기운에 느릿이 눈을 깜박이던 택은 길게 흩어지는 입김과 함께 꾹꾹 눌러만 왔던 제 마음을 꺼내놓았고, 인적 드문 길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던 정환은 택의 고백을 들은 후에도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 앞이 아른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택은 그 정적에 오히려 일말의 희망마저 떨쳐낼 수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정환아. 그리고 택이 정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정환은 그 자리에서 튀어나가듯 벌떡 일어나 섰다. 꽉 쥔 주먹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택은 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것이 기쁨은 아니었고, 홀가분하긴 했지만 안심이 되는 것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답을 할지 예상할 수는 있었다. 한참이나 추운 공기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정환이, 어렵게, 짜내듯 한 마디만을 한 후 택을 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최택.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그리고 감은 눈에서부터 택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길이 새겨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택은 그 날의 그 벤치가 아니라 익숙한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역시 꿈이구나. 결말조차 달라지지 않은 그런 야속한 꿈. 택은 링거 바늘을 꽂지 않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그 날의 꿈을 꾸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나마 정환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그건, 이건, 생각만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정말로 두렵고 무서운 것은, 시간이 흘러 조금씩 변해갈 목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택 자신이 기억하는 정환의 목소리는 그 날의 사늘하고 매몰찬 한 마디가 마지막이라는 것이 두려웠다.
7.
병실 출입문의 창문으로만 흘끗 넘겨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의 모습이 전에 비해 훨씬 더 수척해졌다는 사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문 손잡이를 굳게 잡은 정환은 한참이나 그런 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창문을 넘겨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은 택의 뒷모습이 제게 묻는 것 같았다. 정말 들어올 거냐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들어오려 하느냐고. 물론 택의 병이 제 탓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정환은 결국 문 손잡이를 놓은 채 병실 벽에 기대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매몰차게 최택을 버려놓고, 그 후로도 한 번도 최택을 만나지 않은 주제에, 오히려 최택을 피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어떻게 그 녀석을 보려고. 역시 돌아가야 할까, 선우의 말처럼. 입술을 짓씹던 정환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떨군 채 되돌아가려던 찰나.
“정환아.”
병실 안에서 희미하게 울려퍼진 목소리는 분명 택이었고, 분명 정환의 이름이었다. 놀란 정환이 고개만 돌린 상태로 걸음을 멈추었다. 정환아. 다시금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너무나도 가늘고 유약해서 금방이라도 뚝, 끊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 정환은 다시금 입술을 짓씹으며 아주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병실 쪽으로 걸어가 병실 창문 안을 곁눈질했다. 택은 창 밖이 아닌 정면 쪽을 향해 있었지만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김정환. 또다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정환은 못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택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택은 연거푸 정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정작 택 본인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목울대에서부터 퍼지는 희미한 진동만이 제가 무어라 소리를 내고 있음을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환이라는 이름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채 뭉뚱그러지는 소리의 덩어리인지 알 수 없었다. 택은 그 사실이 못내 힘겨웠다. 가지런히 모은 채 맞잡은 제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 손을 들어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김정환. 진동이 손끝을 타고 퍼져나갔지만 여전히 어떠한 단어를 만들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덜컥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목울대에 얹었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힘주어 파고들면 조금이라도 더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절박함은 들을 수 없는 귀에 대한 원망과 서글픔으로 변질되었다. 택은 링거 바늘이 꽂힌 나머지 손으로 제 한쪽 귀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뜯어낼 듯 꽉 쥐었다. 들리지 않는다.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때에도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았었는데. 그랬는데. 결국 택은 여윈 몸을 옹송그리며 양 손에 힘을 주었다. 링거 호스에는 역류하는 피가 조금씩 배어들었고, 볼품없이 마른 손은 스스로 기도를 졸랐다. 후두둑, 흰 이불 위로 눈물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아, 아, 아아…… 울음 섞인 쇳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뇌종양이라는 사실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에는 어땠더라. 그 때도 지금처럼 모든 것이 원망스럽진 않았는데. 그 어떤 상황도 지금만큼 비참하고 원망스럽지는 않았었는데. 그랬는데. 감은 눈 안으로 스치는 얼굴과, 정적뿐인 세계에 오롯이 울리는 그 목소리에 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깨에 온기가 왈칵, 내려앉았다.
고개를 든 택이 가장 먼저 바라본 것은 희뿌연 시야 안에 가득 들어찬 흰 목덜미와 빳빳한 셔츠, 그리고 검은 제복의 뒷 카라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이상하게도,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그새 촘촘이 차오른 눈에서 일렁이던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툭하니 떨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어야 하는데. 하지만 저를 단단히 끌어안은 몸을 마른 택이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품 안에서 애써 바르작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 깐, 겨우 목소리를 내었지만 제가 생각하는 이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 아까는 그렇게도 몇 번이고 불렀던 이름이었는데도. 지금은 마치 금지된 단어처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이윽고 저를 힘주어 끌어안았던 팔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양 어깨를 붙잡은 단단한 손이, 여전히 택과의 접점을 유지한 채 서서히 얼굴을 마주했다.
“………”
하, 헛숨을 뱉어내며 울 듯 화를 낼 듯한 얼굴을 한 정환이 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젖어버린 택의 눈이 커지며 정환을 제 시선 안에 가득 담았다.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얼굴을 보는 순간 등 뒤에서부터 소름이 돋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으며, 그와 동시에 제 몸뚱아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느끼면서도 차마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시야가 흐려짐과 동시에 눈물이 떨어져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 왜, 이렇게, 말랐냐. 안그래도 마른 놈이. 한참의 정적 끝에 정환이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그 순간 아주 잠시, 제 우스꽝스런 목소리를 택이 듣지 못함에 감사했다. 택은 그 순간에도 한 단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정환의 입모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정환과 시선을 마주했다. 정환의 눈가가 불그스름히 물들어 있었다. 어깨를 붙잡고 있던 다른 한 손이 이번에는 택의 뺨으로 향했다. 한 눈에 봐도 떨림을 멈추지 않는 그 손이 택의 뺨 위에 투박하게,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부드럽게 자리를 잡았다. 엄지 손가락으로 눈물길을 쓸어 지웠다. 그러나 눈을 다시 깜박이자 생겨나는 눈물길을 이번에는 닦지 않은 채 제 엄지로 고스란히 받아내었다. 젖은 뺨 아래로도 확연히 느껴지는 마름에 가슴 한 구석부터 찌릿한 통증이 피어났다.
정환, 아. 그제서야 입을 열어 이름을 부르던 택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두려워졌다. 제가 내는 이름이 온전한지 알 수 없어서 실망할까 두려웠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그래서 저를 피하는 택의 모습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무겁고 큰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정환은 그런 택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환은 그런 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 때처럼 피할 수 없었음을 스스로가 가장 크게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잘 봐. 최택. 목소리를 낮추고, 똑바로 입모양을 보여주며 정환이 택을 제 시선 안에 담았다. 두통 때문인지, 제 상황 때문인지 괜히 웅웅거리는 것 같은 정적 속에서 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환의 입모양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연신 눈물로 담뿍 젖은 속눈썹을 털어내듯 택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긍정의 대답 대신 입을 열어 달싹거리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안해.
…
그리고…
보고 싶었어.
늦게 와서, 미안해. 그 입모양을 읽은 순간 택은 무너지듯 스스로 정환을 끌어안으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정환은 그런 택을 가득 끌어안으며 작은 정수리에 입술을 대었다. 처량맞을 정도로 작은 몸뚱이가 크게 들썩이며 서러운 울음을 연신 흘렸다.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세상을 만나 커다란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택은 서럽게 울었다. 정환아. 정환아. 정환아, 환아, 정환아… 울음에 뚝뚝 끊기는 목소리가 연신 정환의 이름을 불렀고, 정환은 그런 택을 품에 가득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늦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때 너를 그렇게 버려두고 가버려서 미안해. 그 후로도 너를 없는 사람처럼 피해버려서 미안해. 너를 미워하노라 말해서 미안해. 내가 그렇게, 상처를 줘서, 용기를 내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택아.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분명 택은 듣지 못할 고해이자 참회였으나 정환은 택 본인에게 직접 말하듯 모든 것을 쏟아내며 그동안 참았던 흐느낌을 터뜨렸다. 그리고 택은 조금 더, 자신의 모든 힘을 쥐어짜듯 그런 정환을 끌어안았다. 무어라 말하는 정환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 없다. 또한 제가 내뱉는 것이 그의 이름이 아니라도 상관 없었다. 형태조차 알 수 없는 소리의 덩어리일 뿐일지라도 지금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당장 눈을 감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