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 LOVE FOR SALE
한 민 우 X 제 이
준 희
은혜가 없는 집은 이제 더할나위 없이 적막하고 또 황량하다. 시야를 차단시키는 단단한 벽 대신 곳곳에 서서 벽 역할을 하는 유리 진열장들은 처음 왔을 때에는 독특한 인테리어라며 좋아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안그래도 큰 집을 더욱 크게만 보이게 해서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몇일동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시선을 미세하게 돌려 오른쪽을 보면 마우스 곁 아슬아슬하게 가까운 위치에 자리한 재떨이가 시간이 적잖게 흘렀음을 일러주고 있을 뿐이다. 담배꽁초는 눈대중으로만 세어도 흉하게 구겨진 것이 열댓 개, 불만 붙였다가 떠오른 기억들을 황급히 타이핑하느라 끝까지 타도록 걸쳐둔 것이 다섯 개. 그리고 쌓인 것들의 아래에 깔려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몇 개쯤 되겠지. 이제 하루에 담배를 몇 개피나 피웠는지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시간은 아주 오래 되었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조금 덜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저 글을 쓸 뿐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누가 믿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는 사랑을 했다. 아, 이건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리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을 한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누구는 단 한번의 사랑을 하고, 누구는 수없이 많은 사랑을 한다. 나는 아주 많지도 않았지만 한 번 이상의 사랑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나의 모든 사랑의 기원은 내 첫 번째 사랑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은 감히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랑의 가치! 가치와 사랑이 한 문장 안에 쓰일 수 있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 우스운 일이 당연시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연애소설을 읽지 않는다. 아니, 읽더라도 그 수가 현저히 낮아지고 말았다. 연애소설을 통해 얻는 대리만족보다 사랑을 직접 겪는 것이 더욱 생생하고 가슴 떨리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억. 사람들은 더 이상 흰 종이 위에 고스란히 박힌 검은 글자를 읽으며 눈을 감지 않는다. 사람들은 머리에 구멍을 뚫고, 우스꽝스런 기계를 그 구멍에 박아넣고, 누군가 가슴 절절히 겪은 유일한 경험을 유일하지 않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경우에 따라서는 숭고하기까지 할 두 사람의 연애를 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의 연애 체험기로 변질시켜버림으로써 사람들은 스스로의 상상력을 죽여버린다. 읽는 사람에 따라 수천, 수만, 수억 가지의 느낌과 색으로 기억될 수 있을 소설 대신 뉴런처럼 액체 속에서 발버둥치는 기억의 실타래를 선택함으로써. 그리고 그 실타래에 가치라는 것이 매겨지게 된 순간 이래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임에도, 내 사랑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랑을 사고파는 행위에 꽤 염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이라 보기엔 우스울 수도 있으나, 미리 밝혀둔다면 나 역시 그 우스꽝스러운 구멍을 머리에 가지고 있다. 물론 단 한 번뿐이었지만 기억을 팔기도 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나는 그 기억을 내 스스로 팔지 않았다. 흐릿하게 기억나는 과거의 어느 날 은혜는 부모님과 함께 나를 찾아와 병원에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그들을 따랐지만 그들은 나를 치료한 것이 아니었고, 본인들 입에서는 치료라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내 기억을 빼앗아갔다. 나의 사랑이 마치 치명적인 바이러스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발버둥쳤지만 끝내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개골에 구멍이 뚫리고, 두꺼운 바늘이 내 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서,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러브마스터라는 자의 양 손에 내 머리를 통째로 맡기는 것은 그대로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구역질이 났다. 러브마스터의 열 손가락이 내 뇌를 헤집을 때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안돼. 그만해. 이제 그만해. 아니야. 아니야. 빼내지 마. 그건 안돼. 그 기억은 안돼. 은혜야. 엄마. 아버지. 제발 이 사람 좀 멈춰주세요. 은혜야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은혜야 그 기억만은 안돼 내가 잘못했어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 애를 만나지 않을게요 기억만은 가져가지 않게 해주세요제발부탁입니다그냥혼자기억만하고있을게요제발그애를잊지않게해주세요그애혼자감당하기에는너무버거울거예요아닙니다제가잘못했어요얼굴만이라도기억할수있게해주세요그거면돼요다시는말하지않을게요은혜랑평생행복하게살테니까제발어머니아버지은혜야나좀살려줘안돼제이
…… 아무튼. 나는 그렇게 내 사랑을 강제적으로 팔았다. 사랑을 넘겨주고 받은 돈이 이 집을 마련하는 데 쓰이고도 남았으니 나는 사랑을 잃고도 그 사랑 덕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련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 사랑을 어렴풋 기억해낼 수 있었던 건 글을 업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작은 기억의 조각 하나라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던 습관이 마지막으로 남은 정말 작은 조각 하나를 놓지 않고 끝끝내 버티고 있었던 거라고. 나는 그 순간 감사했다. 내 자신에게.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손길에 쓸려나가지 않은 나의 기억 속 연인에게. 그렇게 나는 2년간 모든 것을 까맣게 지워버린 채 살았지만 기억의 조각을 하나씩 되찾고 있는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지만 오히려 더욱 홀가분하다. 아직 은혜는 명목상으로는 나의 약혼녀이지만 부모님도 그녀도 포기했음이 분명하기에 아마 이 집에 찾아오지 않는 것일 테다. 그리고 나는 지금 기분이 꽤 좋은 상태이다. 아까 말했듯이 얼마 전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으니까. 첫 조각을 손에 쥐었던 그 날부터 나는 내 연인을 부르고자 했지만 부르지 못해서 괴로워했다. 목을 틀어쥐고 머리를 싸매도 그 달콤하고 아릿한 사랑을 지칭할 단어가 없으니 그대로 주저앉아 애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적절한 단어 하나가 기억나지 않아 몇날 며칠을 골몰하는 소설가처럼 나는 이름을 부르지 못해 괴로워했고, 그의 이름을 기억해낸 날 나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서럽게 울어버렸다.
제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그의 이름을 부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말려올라가고, 심장부터 손끝까지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과 코끝에 열이 몰리고 찡한 기분이 든다. 이름만 불러도 그는 이렇게 안타깝고 가슴 저리다. 제이야. 나는 다시 네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내가 얻은 기억의 조각들을 또다시 놓치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직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 가슴 저미는 이야기가 작가 본인의 이야기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원숭이처럼 나를 찬미한다. 제이야. 보고 있니. 이 이야기는 나 혼자 만든 게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만든 이야기야. 그러니 제이야, 제이야. 너는 어디에 있니. 내가 어디로 가야 너를 찾을 수 있겠니. 안경을 벗고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눈이 뻑뻑하다. 그러고 보니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잠을 자면 흐릿하게 곳곳이 지워진 제이가 나를 부른다. 분명 행복했는데 일어나면 산산조각난 유리 화분처럼 군데군데만 남아있는 기억이 괴로워 잠들고 싶지 않아진다. 조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대신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면 정신이 다시 또렷해질 것 같았다.
찬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손으로는 더듬거리며 수건을 잡아 얼굴의 물기를 닦고, 한 손으로는 거울 한쪽을 더듬어 찬장을 연다. 찬장조차 앞면이 거울로 되어 있어 찬장 문을 열면 거울과 거울이 45도 정도로 비스듬하게 마주보게 된다. 가끔 그 사이로 끝없는 공간이 펼쳐질 때가 있다. 엘리베이터의 마주보는 거울처럼 말이다. 다만 45도의 각도는 그 끝이 거울의 끝에서 잘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대가 아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한 손으로는 찬장의 약통을 찾아 쥐고, 눈으로는 하지 말라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는 아이처럼 거울 속 공간에 시선을 둔다. 그러면 그 안에는 내 얼굴이 끝없이 존재하게 되고 나를 관찰하는 내가 보이며 눈을 깜박일 때 함께 깜박이는 수백 개의 눈이 있으며 그 끝 잘려 보이지 않는 끝에는
… 제이가 있다.
“제이야. 제이,”
제이야.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며 찬장을 붙잡아 닫자 거울 속 공간이 사라짐과 동시에 남는 것은 내 얼굴 뿐이다. 눈을 크게 뜬 채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한민우가. 이랬던 적이 전에도 있었나? 조금 한심한 느낌에 내 얼굴을 보며 나는 웃었다. 하하. 하. 하. 하. 하하하. 하하. 하하하. 네가 얼마나 그리우면 내가 이런 환상을 볼까. 제이야. 내일은 또다시 너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긴 한숨을 내쉬며 수건을 다시 걸어놓고 약통에서 하얀 알약 두 알을 꺼냈다. 수면제다. 의사는 한 알만 먹으라고 강조했지만 나는 늘 두 알을 먹는다. 한 알만으로는 약효가 돌지 않기 때문이다. 두 알을 손에 쥐고 주방으로 걸어가 컵에 물을 따르고, 두 알을 먼저 털어넣은 후 연이어 물을 마시면 쓴 약이 식도를 가끔 스치지만 안전하게 목 뒤로 약이 넘어간다. 그러면 나는 조금 안심이 된다. 수면제를 처방받고 나서는 꿈을 꾸고 나서도 조금 멍할 뿐 괴로움이 덜해진다. 물컵을 내려놓고 느릿이 슬리퍼를 끌면서 침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조만간 이사를 가야겠다. 이 집은 아무리 생각해도 프라이버시를 심하게 침해한다. 가끔은 탁 트인 공간이 아니라 사방이 막힌 안락한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생각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줄 콘크리트 벽이 말이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사. 이사라…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방은 두 개가 좋겠지. 아무래도.
왜?
너도, 나도 사방이 막힌 안락한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을 거 아냐. 글을 쓰니까.
그래. 그건 동의해. 그래도 잘 때는 같이 자야 해. 이건 지켜.
그 약속 누가 더 안 지키는지 보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모로 누운 몸뚱이에 스며든 또다른 기억.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구나. 제이야. 무겁게 감겨가는 눈에도 불구하고 입꼬리는 말려올라가 파르르 떨린다. 그래. 이 잠에서 깨어나면 이 곳에서 나와 너와 내가 살던 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눈을 감은 너머는 어둠이지만 조금씩 너와 내가 살던 그 곳이 검은 도화지 위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느리지만 조금씩. 수면제를 두 알 먹은 것이 다행이다. 아마 오늘도 이 도화지가 다 채워질 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찾아낸 너와의 행복한 기억 조각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으면서.
한민우의 명의로 된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몇장 떼어온 종이들을 손에 쥐고 낡은 문 앞에 선 나는 아주 잠시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기억나지 않는 기억의 그늘 속 우리는, 너는, 이 집은 원래 네 명의였다. 제이. 그러나 네가 나를 떠난 후, 내가 기억을 빼앗긴 후 이 집은 네가 아니라 내 명의가 되어 있었다. 너는 이렇게 잔인한 행동을 했다. 구태여 네 흔적을 지워버린 이유가 뭐야, 제이. 제발 이 집 안에만큼은 너의 흔적이 조금 더 남아있기를 바라며 나는 받아온 예비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집 안에 햇볕을 타고 먼지가 느릿하게 부유한다. 잔기침을 참으며 문을 닫고 온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은 벗지 않은 채였다. 이미 바닥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만큼이나 너와 내가 이 집을 오래 비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벽을 짚으며 느린 속도로 거실에 걸어갔다. 현관 복도를 조금 걸어 거실에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수북하게 먼지가 쌓여 사람의 형체도 조금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울이었다. 아니, 거울이 아니라 거울’들’이었다. 벽거울, 전신거울, 작은 탁상용 거울들이 무리지어 벽을 메우고 있었다. 거실에 온전히 들어서자 희뿌연 먼지 위에도 나를 담는 거울들이 수두룩했다. 고개를 돌리면 나를 바라보는 거울 속의 내가 있고, 얼굴을 찡그리면 따라서 얼굴을 찡그리는 내가 있다. 그리고 작은 탁상용 거울 속에는 그런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제이가
제이가 있다?
황급히 뒤를 돌았으나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더구나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집 안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분명 제이를 보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제이야.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하. 어설픈 웃음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또다시 환상을 본 것 같다. 너와 내가 함께했던 공간이라 그런 것이다. 나도 참. 본능적으로 너를 기억해내지 않았는가, 이렇게. 아마 너와 내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제이야. 나는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을 뒤로 한 채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네 작업실, 내 작업실, 우리의 침실, 화장실, 주방, 드레스룸까지.
“……하하. 하.”
제이야. 잔인한 널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토록 나쁜 너를.
황량한 제이의 작업실 문 손잡이를 붙잡은 채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제이의 작업실은 처음부터 비어있었던 것처럼 종이 한 조각조차 남아있지 않다. 다 들고 나갔나? 도망갔어? 조금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본다. 칫솔걸이에 걸린 칫솔조차 외로운 혼자다. 헛웃음을 지으며 주방으로 달려갔지만 숟가락도, 젓가락도, 심지어 컵도 하나 뿐이다. 나쁜 놈. 잔인한 놈.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침실 문을 열었지만 베개조차 하나뿐인 침대를 보니 그마저도 쑥 들어가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 흔적을 지우고 사라져버렸을까.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했길래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이렇게 사라져버린 거야. 제이야. 제발 대답 좀 해. 제발. 제이야.
“……대체 왜 이렇게 모든걸 챙겨서 떠나버린 거야. 제이야…… 제이야. 제이. 제이.”
“어디 있는 거냐고.”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왜… 나한테 왜…… 왜 떠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기억 속의 집은 분명 여기가 맞았다. 기억 속에서 너와 나는 저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네게 팔베개를 해준 채 깊은 라인이 지워진 말간 눈과 단정한 이마에 입을 맞췄고, 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픽 웃으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고개를 돌려 화장실을 보면 그 안에선 너와 내가 마주본 채 이를 닦고 있다. 그러다 내가 웃으면 네가 하얀 치약 거품을 입에 잔뜩 묻힌 채 따라 웃지 않았던가. 주방은 또 어떻고. 새벽에 함께 각자 원고를 작업하다가 피곤하면 너나할것없이 주방으로 나와 뜨거운 커피를 타 마시며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했었다. 서로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 식탁에 마주앉아 말다툼도 했었는데 너는 왜 그 기억들을 모두 가지고 떠나버린 걸까?
제이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 기억을 지운 게 잘못이었어? 하지만 믿어줘. 그 기억은 결코 내가 팔고 싶어서 판 게 아니야. 제이야, 알고 있잖아. 내가 너와의 기억을 팔 리가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응? 제이야. 조금, 많이,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결국 침실 문 앞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엉엉 울고 싶었다. 나쁜 새끼. 나쁜 놈. 나쁜 년. 이렇게 매몰차게 떠나면 기억을 하나씩 주워 모으는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 어? 이렇게 숨어버리면. 네가 나를 이렇게 미아로 만들면 나는. 나는… 나는…… 터져나오는 울음에 눈가를 손바닥으로 우악스레 비볐다. 손에는 검댕처럼 까만 울음이 묻어나왔다. 까만 울음이. 까만 눈물이?
아니, 아무것도 없다. 손바닥은 깨끗하다. 그저 내 눈물이 아른거릴 뿐이다. 그런데…
“한민우.”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린다.
“한민우.”
무릎걸음으로 다급히 거실을 향했다. 이내 비틀거리며 거실 한가운데 일어나 선다. 제이. 제이가 서있다. 제이가 나를 마주보고 있다. 제이가 울고 있다. 깊은 눈에서부터 떨어지는 회검빛 눈물이 보인다. 제이야.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슬한 거리를 남기고 닿지 않는다. 다가가도 돼? 제이야. 제이야, 제발. 제발!!!! 그러나 제이는 나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젓는다. 다가오지 마. 한민우. 거기 서서 내 이야기를 들어. 다가오면 나는 또 도망쳐버릴 테니까. 나는 그 원망스러운 목소리에 결국 따를 수밖에 없다. 한민우. 왜 여기로 돌아왔어? 비교적 차분한 물음에 나는 처음부터 말문이 막혔다. 왜냐니. 너를 찾으러 왔어. 여기 오면 너를 찾을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여기에 왔어. 여기에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기억해낸 거야? 네가 여기 살던 그 때를? 제이야. 날 아직 미워하고 있어? 내가 미워? 나는 널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냐. 나는 기억을 판 게 아니라 뺏긴 거야. 나한테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런 소중한 기억인데 그걸 내가 왜 팔아. 어? 왜 팔겠냐고. 팔 리가 없잖아!! 울컥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답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고요하다. 우스운 일이다. 왜지? 난 이렇게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데 왜? 왜기는. 나는 항상 널 보고 있었으니까. 널 항상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항상 네 곁에 있었으니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 곁에 있었다고? 날 보고 있었다고? 날 항상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내가 널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너를 알아볼 수 있는데, 이렇게 너를 기억하는데 왜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았어?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날을 세운 채 튀어나간다. 그러나 나를 보는 제이가 웃는다. 피식. 웃는다. 웃으며 그 새까맣고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거울처럼 나를 그 안에 담는다. 그리고 말한다. 아직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구나. 한민우. 아니면 또 제자리걸음을 하는 거야? 도돌이표처럼?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네 부모님은, 그리고 네 약혼녀는 이 사실을 알면 또 어떤 생각을 하며 절망하게 될까. 응? 한민우. 그 생각은 좀 해봤어? 아니지, 할 겨를이 없었겠지. 너는 사랑에 빠져 네 몸 하나 수면에 띄우기도 벅찼을 테니까. 한민우.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 베스트셀러 소설가. 그리고 제이. 기껏해야 네 책 판매 부수의 삼 분의 일도 안 될 삼류 연애소설 작가. 어떻게 작가 둘이 만나서 이렇게 서로를 잡아먹을 만큼 사랑을 했을까. 어? 한민우. 기억 나? 기억의 조각이 하나씩 빛을 내고 있잖아. 이제 너도 곧 기억해낼 거잖아. 아니야. 나는. 너는. 너도 나 사랑하잖아. 사랑하잖아? 사랑하지? 제이야. 우리 여기서 행복했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 너.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네가 나한테……
“너를 아직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를? 코웃음을 친 제이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새까만 머리가 나머지 얼굴을 반쯤 덮는다. 사랑하는데. 너를.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서글프고 또 천갈래로 갈라지는 느낌이 들면서도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익숙했다. 그리고 그 모순을 깨달은 순간.
제이가 웃으며 나에게 말한다.
“나를 아직도 이렇게 사랑하는 거겠지. 한민우.”
움직이는 것은 제이의 입.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는 한민우의 목소리. 어째서?
제이의 목소리는 어땠지? 제이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었지? 제이의 키는 어느 정도였지? 제이는 왼손잡이였나? 제이는 오른손잡이였나? 제이는 뭘 좋아했지? 제이는 뭘 싫어했더라? 제이는 어디에서 태어났지? 제이는 어디에서 살고 있었지? 제이는 어느 지역에서 어느 학교를 다녔지? 제이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지? 제이는 어떻게 나를 만났지? 나의 목소리는 어땠지? 나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었지? 내 키는 어느 정도였지? 나는 왼손잡이였나? 나는 오른손잡이였나? 나는 뭘 좋아했지? 나는 뭘 싫어했더라? 나는 어디서 태어났지? 나는 어디에서 살고 있었지? 나는 어느 지역에서 어느 학교를 다녔지? 나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지?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만났지?
한민우. 너는 네 자신을 너무 사랑했던 거야.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 자신에게 또 하나의 이름을 붙여줬던 거지.
자기 스스로를 또 하나의 연인으로 정당화 시키면서.
행복했어?
난 네가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슬픈 영화 말고, 재밌는 영화를 보다가도 문득 내 생각이 나서 펑펑 울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 당신이 아주 괴롭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우리가 흥얼거렸던 그 노래 때문에, 내가 보고 싶어서 가슴을 치고 괴로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는 내가 없어도 잘 지내야 하고. 그러면서도 아주 많이 슬퍼해야 하겠지.
그건 행복한 걸까, 슬픈 걸까. 한민우. 어떻게 생각해?
분명한 건, 적어도 누군가는 너와 내 기억을 진짜 연인의 기억이라고 떠올려 줄 거야.
그 모든 진짜같은 거짓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어줄 테니까.
M FOR SALE
MEMORY FOR SALE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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