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주."
짤막한 부름에 소년에 가까운 남자가 피에 젖어 채 온전히 뜨지 못하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본다. 소년과 달리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남자는 한참이나 소년의 젖은 눈을 응시한다. 피에 젖은 것인지, 눈물에 젖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이다. 남자는 소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저를 피하지 않는 시선 너머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소년 본인조차도 모를 것이다. 지금 소년의 표정은, 그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이제 소년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복수도, 가족도…… 소년은 알고 있었을까. 복수의 끝에는 무저갱처럼 깊은 허망함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 비밀을. 남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남자는 지금 그 무저갱 바로 앞에 서있다. 그리고 무저갱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끝없는 밑까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이라면 끌어올릴 수 있다. 남자가 손을 내밀면, 지금은. 아직. 하지만 소년이 그 남자의 손을 잡을까. 어쩌면, 남은 것 하나 없는 인생에 이제는 미련조차 남지 않았다면. 하지만….
"일어나. 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을 뻗은 남자의 손 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소년의 피로 얼룩진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깨끗한 제 손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당신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 해. 그러니까 당신은 살아. 만약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살아야 해. 남자를 제 등 뒤에 두고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소년이 나직하게 중얼였었다. 그래. 그랬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이를 드러내고 보이는 모든 것을 물어뜯는 사냥개의 눈빛을 한 소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너의 주인일까. 그 언젠가, 조금은 까마득히 먼 어느 날 누군가는 이들을 미친개라 불렀다. 물어뜯고, 늘어지고, 숨통을 조이라고. 그 후에는 사냥 끝에 지친 사냥개들을 복날이라며 잡아먹으려 들기 바빴다. 그러나 남자는 달랐다. 남자는 그만큼 모질지 못했고, 그만큼 정이 없지 못했다. 남자는 상처입은 짐승을 두고 돌아설 만큼 매정치 못했다.
"……두고 가."
소년의 목소리가 무겁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않고 소년을 바라본다. 남자가 소년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저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제 삶을 뒤흔든 판에 뛰어든 이래로 남자는 단 한 번도 멈춰선 적이 없다. 멈출 수 없으니 당연했다. 멈추면 뒤쳐졌고, 뒤쳐지는 순간 찔리고 밟힐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살기 위해 멈출 수 없었고, 복수와 신념을 위해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안도감과 뒤섞인 기묘한 허탈함이 남자를 떠나지 않고 어깨를 짓눌렀다. 정말 끝인가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제가 믿는 정의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낸 것에 벅차기도 했다. 아니, 기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지. 그리하여, 그러다가도 이제서야 우두커니 설 수 있음을 꺠달은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그런 마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저를 덮치려 들어서. 제게도 그러한데 소년에게는 어떻겠는가. 아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은 것이 소년의 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년 역시, 알고 있을 테지. 그렇기에 더욱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가자."
"……"
"…같이, 가자."
남자는 묻고 싶었다. 네 기억 속에서, 같이, 라는 단어가 통용되던 순간은 언제였느냐고. 그 작고 어두운 방에서 홀로 지냈을, 누군가의 밑에서 대신 죄를 등에 업고 가슴에 주홍색 낙인을 단 채 한 평 남짓 음습한 방 안에서 창 밖만을 노려보았을 그 순간에도 홀로였을 너는. 알량한 동정심이라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맞을지도 모르니까. 알량한 동정, 얄팍한 연민. 구차한 자기 위로. 너에게 손을 뻗음으로써 내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한강주."
지금 네 눈빛이 내게 말하고 있다.
나를 데려가 줘.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줘.
"나는, 사냥이 끝났으니 복날이라며 사냥개 잡아먹는 짓 같은 거, 안 합니다."
때문에 남자는 부러 어설프게 웃어보인다. 등 뒤에서 보호받았다 하더라도 온전히 걸어나온 것은 아니었던 터라 터진 입가며 눈가가 쓰라렸다. 그러나 남자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버려진 개를 안심시켜 경계심을 풀기 위해 지어내는 억지 웃음과도 비슷해 웃음을 짓는 남자는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여기서, 너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며 함께 가자 할 수는 없잖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너와 함께,
살고 싶으니까.
남자의 눈시울이 일순 붉어진다. 눈가에 열이 오른다. 마음을 한 꺼풀씩 벗겨낼 수록 연약한 속내가 드러난다. 그래. 거창한 이유 모두 다 집어 치우고, 이제는 쉴 때가 됐다. 우리. 너무나도 가파르고 거친 길을 쉴 틈 없이 달리기만 했다. 이쯤 되면 우리도 음습한 이끼 천지에서 벗어나 햇볕을 쬐어도 되지 않을까. 너무 오래 빛을 받지 못해 양지를 잊어버린 너라면, 나라도 좋다면, 괜찮다면 내가 너를 이끌고 양지로 나가 두 다리 편히 쉴 수 있게 해줄테니까.
"한번 주운 개는 끝까지 책임져요. 난."
그러니까 당신 내가 책임지겠다고. 차마 가다듬을 새도 없이 떨림을 가득 채워 나온 목소리에 소년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울 것 같은 눈을 한 주제에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다. 소년은 남자가 꼭, 제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남자 본인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가에 시선이 닿으니 소리없는 탄식이 흘러나올 것 같다. 당신만큼은 완벽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는 다르게 깨끗한 손을 차마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미친개를 사냥개로 만들어 달려들 수 있도록 목줄을 풀어준 것이 그였다. 나를 미친 개새끼가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 준 단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다. 그런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누구의 목덜미든 물어뜯을 자신이 있다. 소년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 코, 입, 부드런 입매와 가는 턱선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을 듯 눈에 담았다. 남자는 저와 같은 곳에서 달리기에는 너무 연약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잘 지켜야 했는데.
"한번 쓰고 버려질 개 하지 말고, 앞으로도 내 등 지킬 사냥개. 그거 하자고, 너. 언제까지고 내가 길러줄 테니까."
"…비겁해. 당신."
그런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야. 적어도 내 눈을 바라보면서 말할 거였으면.
너,
살면서 나는…… 살면서 나는…… 그런 말 좀 하지 마 죽었으면서 / 김소연, 사랑과 희망의 거리
살았어야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강주가 비틀이며 한 팔로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눈 앞에 아무도 없는 현실은 여전히 어둡고 음습하다. 어설프게 웃어보이는 입매도, 눈물을 함뿍 머금고 있는 눈가도, 펜 잡을 법한 손가락에 잡힌 굳은 살을 제외하면 유난히도 길고 곧았던 손도 없다.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 노진평.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처음부터 당신은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저 당신의 사냥개 중 하나였고, 어쩌면 당신은 나를 그저 한 마리의 미친개로만 봤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당신을. 나는. 흐, 바람 빠지듯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킨 강주가 벽을 더듬거려 피묻은 야구 배트를 손에 쥐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나의 달음박질도, 당신의 유지遺志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는 계속 달려야만 한다. 무릎이 꺾이고 발이 죄 찢어져도 나는 달려야만 할 것이다.
노진평.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 그냥, 사냥개와 목줄을 틀어쥔 주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지켰던 그 모습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세요. 이제 목줄 틀어쥘 주인을 잃은 사냥개가 날뛸 차례다. 그러니까 더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그냥, 그냥. 내가 또다시 모든 것을,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끝냈을 때, 아니면, 내가 가쁜 숨을 거둘 때… 그때 내 앞에 나타나요. 그때 다시 내 목줄 틀어쥐고, 억지 웃음이라도 좋으니 웃으면서,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줘.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테니. 어디든 당신 뒤에 서서 당신을 지킬 테니. 내가 처음부터 배운 것이 그것이었으니 마지막까지도 그러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가.
당신의 끝을 내가 마무리지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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