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우 X 임중경

최초의 최후



1.

  나 공안부로 가기로 했다.

 상우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중경 역시 무던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확정이야? 그래, 그쪽도 인원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라. 마침 자리도 났고, 또 특기대 출신이라고 하니까 그쪽도 손해는 없겠다 싶었나보지. 부장님이 말을 잘해준 걸 수도 있고. , 어쨌든. …… 상우의 말 끝이 점점 흐려졌다. 중경에게서 이렇다할 반응이 없던 탓이다. 그러나 상우는 고개를 돌려 중경을 바라보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목이 굳어버린 것처럼 정면을 바라보며, 목소리만 가벼이 내었을 뿐이다. 전부터, 그래. 그랬잖냐.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심리 상담 때도 그랬고, 대장님 찾아가서 몇번 부탁드린 적도, 있었고. 근데 결국 들어주시긴 하네. 난 이대로 짐 챙겨서 나가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거든. … 중경아. 임중경? 상우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중경은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늘 그렇듯 먼저 뒷모습을 보였다. 상우는 잠시 느리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제 식판을 챙겨 일어났다. 어쩐지 입 안이 썼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으나 실제로 마주하니 목에서부터 쓴물이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날이었다면 그런 임중경과의 거리를 좁혀 끝끝내 얼굴을 보았을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보나마나 여느 때처럼 변화 하나 없는 무덤덤한 표정이겠지. 넘겨짚으며 상우는 소리없이 숨을 내뱉었다. 

 그러니 한상우는 마지막까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공안부로 가기로 했다, 그 한 마디에 일그러졌던 임중경의 눈을. 


2.

 그날 밤, 중경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데도 그랬다. 피로 점철된 그 날을 기점으로 한상우는 어그러졌다. 물론 그날 작전에 투입되었던 모두가 그랬다. 누군가는 훈련소에서 목을 매었고, 누군가는 심각한 환청과 환각에 시달리다 결국 의가사 제대 처리되었다. 그 날의 모두가 피해자였고, 그것은 중경과 상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날부턴가 한상우는 과호흡에 시달렸다. 비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발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주로, 프로텍트 기어를 착용하거나 총을 들어 누군가를 겨누어야 할 때 호흡의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라지곤 했다. 자연히 한상우의 훈련 열외 수가 잦아졌고, 그 날의 사건을 겪었던 다른 이들보다도 의무실을 찾는 횟수가 높아졌다. 사실 종래에는 남은 것이 중경과 상우 뿐이었으니 상대적으로 더 많아보이는 것도 있을 터였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작전을 지휘한 핵심 대원이 상우 본인이었으니, 특기대를 이탈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기도 했다. 특기대의 창설과 궤를 같이 한 중경 자신도 이렇게 악몽과 환각에 시달리는데, 사격 명령을 내렸던 그는 오죽할까. 다만 그렇다 보니, 중경과 상우는 결코 서로에게 위로의 손길도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서로의 고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 은희경, 소년을 위로해줘




 하여, 결국 늘 그러하듯 이불을 가지런히 접어두고 담배 한 갑만 챙겨든 채 내무반을 나선 것이다. 혹여 곤히 잠든 동료가 깰까 핸드폰의 플래쉬도 켜지 못한 채 중경은 조용히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바깥은 스산했고, 열기 하나 품지 못한 바람이 중경의 뺨을 스쳤다. 중경은 잠시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다 느리게 발걸음을 옮겼다. 군데군데 무너지고 금이 간, 고무탄이 관통한 흔적이 수없이 남은 폐건물. 중경과 상우를 비롯한 특기대 대원들이 지겹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장소였다. 그러나 특기대 본부에서, 벽을 넘어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한 몸을 숨긴 채 담배에 불을 붙일 수 있는 곳 역시 이곳이 유일했다. 중경은 건물 초입에 들어서 항공점퍼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걸음을 조금씩 늦추며 라이터를 꺼내들었지만, 이내 걸음이 멈추고 담배 끝에도 불을 붙이지 못했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상우였다. 


3. 

 너도 잠이 안 왔나 보네. 상우가 픽 웃으며 옆으로 조금 물러 앉았다. 중경은 잠시 그런 상우를 바라보다 다시 걸음을 옮겨 그가 내어준 자리에 걸터앉았다. 잊고 있었다. 저만큼이나 그 역시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제 근처 비어있던 하나의 침대를. 제 머리가 어지러워 주변을 제대로 살필 생각도 못했지. 특기대 실격이다, 임중경.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중경은 시선을 내리깔아 상우와 제 발치를 바라보았다. 볼품없이 짓이겨진 꽁초가 두어 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담배를 피울 생각이 사라져 중경은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다시 집어넣고, 담배갑 역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동안 둘은 정면을 응시했다. 시선은 평행을 이루었다. 먼저 목소리를 낸 것은 중경이었다.

"언제 가는데."

"내일 아침."

"내일?"

 생각보다 빨랐다. 중경은 대번에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금 상우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상우는 중경을 바라보지 않았다. 끈질길 만큼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중경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정해진 거, 좀 됐다. 너 훈련 간 사이에 서류도 제출했고. 얼마 전에 상담 치료 받으러 나갔을 때, 돌아오는 길에… 들르기도 했고. 공안부에. 그래, 말 미리 못한 건 미안하다. 그런데… 그래. 말 할 타이밍이 안 생기더라. 너도 어떤 상태인지 아니까. 그리고, 나보고 다들 뭐라고 하는지 아니까. 괜히 너한테 말해서 너까지 부담 갖게 하기 싫었고. 제법 길게 자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상우가 어설픈 웃음을 뱉었다. 그래서, 잠이 안 오더라. 오늘은. 그런데 너는 왜 나왔냐. 내일 오전 훈련 아니야? 상우의 말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얼굴을 돌아봐야 함이 옳으나 상우는 차마, 고개를 돌려 중경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무던한 시선이 돌아올까 두려워서였다.

"한상우."

 이번에야말로, 중경의 표정은 상우의 생각대로 무던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상우가 그런 중경의 목소리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라이터를 매만지던 손이 그대로 행동을 멈추었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무어라 말을 뱉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던 사이 중경이 시선을 내리깐 채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 거기선. 별 일 없었으면 좋겠다. 공안부라면 확실히, 우리처럼 현장에 나갈 일은 별로 없겠지. 넌 머리도 잘 굴리니까, 적응도 잘 할 테고…. 이윽고 중경이 깨물듯 입을 다물었다. 중경과 상우, 특기대 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핵심대원들이었으나 전투의 스타일은 확연히 달랐다. 중경이 상황 속에서 주변을 파악하여 즉흥적으로 전투를 이어갔다면 상우는 투입되기 전, 혹은 투입 직후 최대한 주변을 미리 파악한 후 동선부터 퇴로까지 미리 그려두는 작전을 선호했다. 그리고 특기대 내에서는 중경의 방식을 조금 더 선호했다. 그러니 공안부에서는 분명, 잘 하겠지. 그러리라 믿는다. 그러나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한지는 중경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서운함일까? 아니면, 야속함? 원망? 그렇게 무심코 다시금 시선을 들었을 때, 둘의 시선은 그제서야 서로를 마주했다. 일순 상우의 눈이 일그러졌다.

 중경의 눈이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심한 목소리로 말할 거였다면 이런 표정이나마 보여주지 말지. 적응도 잘 할 거라며 말로 먼저 보낼 거였다면 이쪽을 바라보지나 말지. 너는 모른다. 너는 아마 영원히, 죽기 전까지도, 죽은 후에도 모를 것이다. 몰라야 한다. 만약 안다면, 너는 이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아서는 안되는 거였다. 너는 차라리 무감해야 했다. 나의 이탈에도 그저 무던해야 했다. 마지막까지 그리 보여야 했다. 내가 너의 무심함을 양분 삼아 여기까지 도망쳤는데. 결코 너는 나와 같은 표정을 짓지 못하리라는 그 믿음 하나로, 나는 겨우 너를 떠나기 직전까지 도달했는데. 젖은 눈이 다시금 내리깔린다. 상우의 일그러진 시선을 피한다. 그리고 던져지는 목소리는,

"너무 늦어서, 붙잡을 수도… 없겠고."

 이다지도 유약하다. 너와 내가 특기대의 첫 발을 내딛던 그 순간부터 너는 내게 단 한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꿈에서도 결코 보이지 않던 이 표정에 한때는 매달렸고, 염원했으며, 또 눈물이 날 정도로 바랐다. 그러나 너는,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목소리를 낼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으면서. 그랬으면서, 이제서야. 처음부터 가능성조차 재고할 수 없도록 나를 무력하게 만들어놓고, 이제서야 나를 이런 표정과 이런 목소리로 대하다니. 상우는 지금 이 순간이 억울해 미칠 것 같았으나 그 감정이 누구를 향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격 명령을 내렸던 한상우 자신? 작전을 내렸던 장진태? 거짓 정보를 흘린 섹트? 원망할 사람을 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억울했다. 그리고, 오롯 자신을 향해서만 보이는 저 유약함에, 순식간에 목이 타들어갔다. 

 입을 맞춘 것은 순식간이었다.

 상우의 한 손에 들려있던 담배가 툭하니 바닥으로 떨어지고 네 번째 꽁초가 되었다. 다른 손은 중경의 곧은 뒷목을 감싸 당겼고, 중경은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그대로 상우의 허벅지에 손을 얹어 몸을 지탱했다. 달빛을 받아 한쪽에만 드리워지는 그림자, 그것이 중경의 마지막 시선이었다. 중경은 눈을 감았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 앞에서 그는 본인이 무력하고 또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그랬다. 그림자 속 벽에 기대어 중경을 바라보던 소녀들의 눈이 사라진다. 발작의 전초증상처럼 뛰던 심장은 오히려 가라앉는다. 미열이 중경의 뒷목을 감싼 손바닥부터 퍼졌다.

 어쩌면 우리는 사실, 서로의 고독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어떠한 말도 필요치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너무 늦어버렸다. 

우리는 그 어떠한 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최초의 연인처럼 네 입술에 달게 맺힌 사랑을 나눠 삼킨 이후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뱉어 버린 이유로 낙원에서 나락으로 가요 이 선율에[각주:1]



  1. 심규선, 촛농의 노래 [본문으로]



나는 그의 뒷모습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에서 세계를 본다.




최성욱 X 노진평


세계를 기억하는 한가지 방식



  검사님. 이제 다시 보지 맙시다. 지겨워 죽겠으니까. 성욱은 책상 너머 단정하게 앉아있던 진평을 두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장 자켓은 제대로 걸치지도 않은 채 제가 앉았던 의자를 발로 툭 밀어내고, 사무실에서 나가기도 전에 담배를 꺼내 문다. 진평은 그를 제지하려는 실무관을 손짓으로 만류한다. 진평의 손길은 익숙함이 가득 묻어난다. 성욱의 표정 역시 짜증이 가득 어려 있다. 진평은 그의 뒷모습만으로도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그려낼 수 있었다. 쾅, 소음처럼 문이 닫히자 사무실 안의 직원 몇 명이 어깨를 움츠렸지만 진평은 그 소리가 날 줄 알았다는 듯 평온하게 서류를 뒤적였다. 최성욱이 저거 참. 난 놈이에요. 그죠? 성욱의 발소리가 멀어지면 수사관이 질렸다는 듯 혀를 내밀며 고개를 젓는다. 서른도 안된 놈이 가지고 있는 업장이 몇 개야? 이 새끼는 밥 먹고 약만 팔았나...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진평은 서류를 내려다본다. 흰 종이 위의 검은 글자들이 익숙한 구조로 자리하고 있었다. 진평은 눈을 깜박이며 글자를 내려보다 펜을 내려놓았다. 시간은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다들 일찍 퇴근하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진평이 코트를 집어들어 걸치며 말하면 진평을 제외한 둘이 놀란 듯 고개를 든다. 검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웬일로 저희한테 그렇게 말해주시고. 사무관이 어설프게 웃으며 농담을 던지면 진평이 짤막하게 웃는다. 하루쯤은 일찍 들어가서 쉬셔야죠. 여기에 목 매다가 과로로 쓰러져도 누가 알아준답니까. 아직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이니 다들 퇴근 시간은 잘 챙기세요. 진평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으며 또 몇 번이고 외운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그 유연함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진평은 먼저 갑니다, 그 말만을 남긴 채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일련의 행동에는 그 어떠한 불순물도 없었다. 몇 번이고 매끄럽게 갈아낸 곡선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노진평. 넌 진짜 지겨운 새끼야. 알고 있냐? 성욱이 그리 물으면 진평은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인다. 다시 보지 말자던 성욱은 서원지검 건물 후문 근처 골목에 대놓은 그의 차에 기대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성욱의 발치에는 볼품없이 몸을 구긴 꽁초가 서너 대 정도 나뒹굴고 있었다. 진평은 그것을 잠시 힐끔 바라보다 담배 연기 사이 그려지는 실루엣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지겨운 새끼 기다리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하셨나 봅니다. 그리 말하면 성욱이 인상을 찡그리며 반쯤 사그라든 담배를 떨어트려 구둣발로 짓이겼다. 자갈이 바닥과 비벼지는 소리와 함께 희미하게 올라오던 연기마저 끊겼다. 성욱이 정장 바지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은 채 진평을 바라보았다. 곧 비가 오겠네요. 진평이 그리 말하면 성욱이 이번에는 하늘을 바라본다. 그래. 비가 오겠지. 오늘은.


  오늘 밤에. 나한테 시간 좀 내줘요. 조수석에 앉은 진평이 말하면 성욱이 대번에 얼굴을 찡그린다. 검사님. 내가 검사님이 콜하면 달려가는 따까리야? 아니면 검사님이 내 정부야? 코웃음치며 대번에 거절의 말을 건네지만 진평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성욱이 거슬리는 말을 할 때마다 으레 지어보이는 찡그림도, 난감한 표정도 없다. 마치, 그리 말할 줄 알았다, 는 듯한 표정이다. 성욱은 그 표정이 오히려 더 거슬렸다. 노검사. 나한테 미끼 던져? 물면 좋고 안 물면 두고?


  아뇨. 그럴 위인은 아니죠, 제가. 최성욱 씨가 더 잘 아실텐데. 그럼 왜 되먹지 못한 수작질을 부려대? 검사님 답지 않게. 글쎄요. 사람이 늘 똑같이 굴 수 있나요. 그러는 최성욱 씨야말로, 절 여기서 기다리셨잖습니까. 최성욱 씨 답지 않게. 그 말에 허, 웃어보인 성욱이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 새 담배 한개피를 입에 문다. 달칵, 매트 블랙의 지포라이터가 불을 붙이면 진평은 그 모습을 흘끔 바라볼 뿐 크게 제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담배를 입에 문 채 성욱이 물음을 던지면 진평은 코트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넣은 채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본다. 잠깐의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는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미친 새끼. 섹스하자고 할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것도 재주다. 성욱은 늘 진평의 금욕적인 모습에 몸이 달았다. 그의 목소리는 단정했고 표정은 위태로웠다. 성욱은 그런 진평을 ■■■■


  오늘 밤이 아니면 안 되거든요.


  짙은 선팅이 된 차 유리를 가림막 삼아 입술이 겹쳐진다. 처음으로 단조로운 구조 속에서 유연하게 헤엄치던 진평의 손끝이 잘게 떨린다. 



  결국 비가 내렸다. 의도적으로 조명을 모두 꺼놓은 진평의 방에 요란한 빗소리가 울려퍼졌다. 구겨진 이불은 한쪽으로 밀려나 진평의 한쪽 다리를 겨우 가렸다. 이따금씩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방을 비추고 사라졌다. 성욱은 침대가에 앉아 비가 쏟아져 부딛치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습관처럼 입에는 담배를 문 채, 성욱은 핸드폰을 한 손에 들고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간다, 라든가 이제 가야 해, 같은 친절한 설명 하나 없이 성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평은 침대에 모로 누워 그런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헤드라이트가 방을 비추고 지나갔다. 성욱의 뒤로, 제 위까지 그림자가 드리워지다 어둠에 묻힌다. 


  최성욱 씨. 성욱은 답하지 않는다. 성신동에 가는 거죠. 이번에도 성욱은 답하지 않았다.


  가지 마요.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지. 너. 답 대신 성욱은 제 쪽에서 물음을 던진다. 진평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성욱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제 셔츠를 주워들었다. 가지 말고 여기 있어요. 재차 진평이 성욱에게 말한다. 용건 없으면 간다. 기다리지 마. 안 올 거니까. 둘은 서로에게 답이 될 수 없는 답을 내어놓는다. 결국 눈을 감는 것은 성욱이다. 성욱은 진평이 어떤 마음으로 저를 만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순히 몸을 섞는 관계라 하기에 그의 시선이 가끔은 깊었고, 그렇다고 해서 연애놀음 같은 것을 하기에 그는 늘 한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성욱은 그것이 선을 긋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 역시 무던히도 선을 긋고 또 그었다. 비록 그 선을 늘 먼저 넘는 것이 본인이었음에도 자꾸만 그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선을 넘다 못해 함께 무너질 것만 같아서였다. 무너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를 ■■■■ 것과는 별개로 성욱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성신동. 삐그덕거렸던 복수는 이제 마지막 코스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니 멈출 수 없었다. 


  양 팔로 몸을 짚어 일어나 앉은 진평이, 이번에는 방문 근처에 선 성욱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한번 더 헤드라이트가 쏟아져 들어오며 성욱의 등을 비춘다. 적당히 하자. 노진평. 호구잡이도 한두번이지. 할 말 있으면 내일 해. 오늘은 갈 데 있으니까. 그 말을 건넨 성욱이 머리를 쓸어올리고 단추를 잠궜다. 


  내일 당신이 죽는대도? 그 말에 성욱의 손이 멈췄다.


  당신을 만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어요. 당신의 길은 정해져 있었고, 나는 자유로웠으니까. 출발점에 서서 모든 루트를 확인했으니까. 내가 당신을 만날 수 있는 루트는 오직 이거 하나 뿐이었어요. 연극의 대사를 읊듯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다른 장르의 오디오를 떼어다 붙인 것만 같은 단조로운 목소리에 성욱이 결국 뒤를 돌았다. 어느새 침대가에 걸터앉은 진평이 흰 셔츠를 어깨에 걸친 채 성욱과 시선을 마주했다. 미친 새끼. 성욱이 코웃음치며 진평의 앞에 다가가 선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노진평. 장르가 바뀐 건 신선한데, 슬슬 재미 없다. 이제.


  당신이 지금 나가면 어딜 갈지 다 안다는 뜻이에요. 뒷조사를 꽤 성실하게 했나 보네, 검사님이. 깡패 새끼랑 뒹굴더니. 그렇다고 치면 안 갈 겁니까? 적당히 하자. 재미 없다고 했을텐데. 내가 말해준다면요.


  성신동 일가족 살해범이 송진석인지 아닌지. 이번에는 성욱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만약 니 말이 다 사실이면. 성욱의 목소리에 진평이 침묵을 지켰다. 성욱 역시 잠시간의 텀 후에 말을 이었다. 우린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진평이 말없이 성욱을 바라보았다. 내 인생이 좆창나든 말든 니새끼는 나를 무시하고 지나쳐야 했다고. 내 끝이 어떻게 될 지 알고 있었으면. 누가 개입을 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면. 적어도 구경은 하지 말았어야지. 지금처럼. 내 삶에 끼어들어 잠시 간 좀 보다가, 나 뒤지고 나면 좆같은 결말로 끝난 책 덮은 것처럼 홀가분하게 살다 뒤지시게? 내가 그런 게 싫어서 종교를 안 믿었어요. 어느새 성욱의 목소리는 고해성사에 가까워져 있었다. 


  다 지켜보고 있잖아. 신도들이 기도하는 대가리, 곱게 모은 손, 제발 들어주시라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 근데 아무것도 안 이뤄주잖아. 그냥 보고, 듣고, 끝이라고. 내가 그게 싫어서 고아원에서 절대 종교를 안 믿었어. 하도 믿으라고 지랄하길래 싫다고 반항을 했더니 뺨을 얻어맞았고. 그날 새벽에 거길 나왔어. 담을 넘고. 날 끌어올려줄 생각이 없다면, 다시는 날 쳐다보지도 말라고. 어느새 담배 새 개피가 몸을 태우고 재만 남았다. 진평은 놀람도, 동요도 없이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마치,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다 안다는 것처럼. 그 말을 들을 줄 알았다는 것처럼. 성욱은 그런 진평이 못마땅했다. 그러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한번도 다른 이에게 꺼내본 적 없는 말들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불상이며 예수상 앞에서 신을 찾는 건가 싶은 생각이 아주 잠시 스쳤다. 우스웠다.


  그렇다고 해서 성욱이 진평의 말을 믿는 것도 아니었다. 믿는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다. 성욱은 진석을 쫓고, 사고가 나고, 결국 진상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자살할 것이라 진평은 말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이런 느낌일까. 당신은 내일 죽습니다. 더이상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성욱은 중요한 순간에 늘 무력했다. 다섯살 때 어머니와 누나를 죽인 범인 앞에서 그러했고,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뺨을 얻어맞았을 때에도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성욱은 진평의 앞에서 무력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가 지금 나를 붙잡고 늘어져도 미래가 바뀌지 않는다면, 굳이 그 말을 내게 꺼내는 이유가 뭐냐고 묻잖아. 성욱의 목소리는 조금 지친 듯 했다. 그 새끼는 우리 아버지한테 사주를 받았고, 우리 아버지는, 엄마를, 죽이라고 했다고. … 사실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거든. 조사를 해보니 죽기 전에 사망 보험을 존나게 들어놨길래. 그래서. 혹시 했는데. 그래도, 그 새끼를 잡기 전에는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아닐 거라고, 아니, 맞을 거라고, 늘 그렇게 선 위에서 비틀거리면서 걸었어. 근데 니가 그렇게 말해버리면. 하하, 씨발. 진짜 어이가 없고 허무하네. 성욱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제법 찍혀 있었다. 거의 민마담과 박선생이었다. 가기로 했던 시간보다 두어 시간은 늦었으니 그 쪽은 아수라장일 터였다. 성욱은 긴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가야 했다. 


  성욱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겼다. 함께 일어난 진평은 그가 현관에서 구두를 신을 때까지도 성욱을 붙잡지 않았다. 성욱은 그런 진평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성욱은 문득 자신이 죽으러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면서도 성욱은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러니 피차 마찬가지였다. 사실을 알든, 모르든 자신이 시한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노진평. 성욱의 목소리에 진평이 고개를 들어 성욱을 바라보았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거실 베란다를 넘어 성욱의 등으로 쏟아지다 이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예. 말하세요.


  넌 왜 날 만나는 쪽을 선택했어. 그 말에 진평이 다시 시선을 내려 성욱의 구두 뒤꿈치를 바라보았다. 성욱은 진평이 답을 내어놓을 때까지 문을 열고 나가지도, 뒤돌아 서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다. 당신이 궁금했거든요. 당신이 걸어가는 길을 조금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싶었습니다. 진평의 말에 성욱이 문 손잡이를 잡은 채 한참 침묵을 지켰다. 신이 있다면 꼭 노진평처럼 말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성욱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진평은 성욱을 붙잡지 않았다. 내일 봅시다, 라든가, 다음에 봅시다, 혹은 연락할게요,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성욱 역시 그에게 그 어떤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결국 진평은 성욱이 원하는 답은 해주지 않았다. 씨발. 닫힌 문 앞에 서서 성욱이 나직한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진평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이제는 헤드라이트도 넘어오지 않는 베란다 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보이는 도로에는 몇 대의 차들이 자신이 가야 할 루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저 안에 아마 성욱의 차 역시 있으리라. 헤아릴 수는 없었으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모든 것은 패턴과 구조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므로.


  진평은 자신이 진짜 이유를 밝혀도 성욱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바람에 깎이고 부러지며 날카로운 조각만 남은 그는 결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널 위해 이 생을 선택했고, 그래서 당신을 살렸고, 결국 당신보다 먼저 죽노라고. 하지만 이것은 내가 선택한 삶이니 당신은 나를 잊어버리고, 어떻게든 살아가라고. 당신은 그렇게 될 거라고. 그런 말을 들으면 성욱은 그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진평은 모든 것을 '숨기기로' 했다. 진평이 이 생을 선택함으로서 성욱은 죽지 않는다. 그러나, 진평은 내일 죽을 것이다. 자신을 제거하라는 오더를 받은 특수 3부의 동료의 차에 치여서. 진평은 이 루트를 선택하기 전부터 자신의 결말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삶을 선택했던 것은 오롯이 성욱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루트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성욱을 위해 이 생을 선택했다는 것은 조금 어폐가 될 수 있겠다. 결국 내가 당신을 만나기 위함이니 결국은 나 자신을 위해 이 생을 선택했다는 답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오류 정도는 대수롭지 않았다. 진평은 성욱이 나간 현관문을 문득 시선에 담았다. 성욱은 이제 더이상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성욱은 성신동으로 갈 것이고, 민마담과 박선생을 대동하여 진석이 진범임을 제대로 알아낼 것이다. 믿을 수는 없을 테지만 제가 말해준 진실로 인해 성욱의 마음은 그가 진범이다, 라는 쪽에 기울어질 것이다. 그러니 성욱은 진석의 입으로 모든 진실을 들은 후에도 병원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복수로 점철되었던 그 남자의 인생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단 한번도 그에게 ■■■■ 말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저를 잊는 데에도 긴 시간을 들이지 않을 것이며, 어떻게든 살아낼 것이다. 진평은 다시금 성욱을 떠올렸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들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¹


  진평은 이번에도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몇 번의 되감기 중, 진평이 성욱에게 ■■■■ 말할 때마다 성욱은 진평의 죽음을 전해듣고 눈물을 흘렸다. ■■■■는 말은 정해진 길을 걸어가야 하는 그에게 있어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였다. 진평은 성욱에게 ■■■■ 말할 수도 있었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고정된 미래가 바뀌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평이 성욱에게 ■■■■ 말할 때마다 성욱은 힘겨워했다. 그렇기에 진평은 이번에도 그가 원하는 답을 내어놓지 않았다. 그저 몇 번의 되감기와 되풀이를 반복해 그를 만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언젠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나를 이기적이라 할까. 진평은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룸으로 걸어갔다. 마지막 출근을 준비할 시간이었다. 






 특수 3부의 비리에 젊고 유능한 검사가 사망했다는 사실에 시민들의 안타까움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사망한 노 모 검사가 이명득 전 검사장 구속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시민들의 추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

1. 장강명,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148p , 문학동네









"한강주."

 짤막한 부름에 소년에 가까운 남자가 피에 젖어 채 온전히 뜨지 못하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본다. 소년과 달리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남자는 한참이나 소년의 젖은 눈을 응시한다. 피에 젖은 것인지, 눈물에 젖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이다. 남자는 소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저를 피하지 않는 시선 너머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소년 본인조차도 모를 것이다. 지금 소년의 표정은, 그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이제 소년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복수도, 가족도…… 소년은 알고 있었을까. 복수의 끝에는 무저갱처럼 깊은 허망함만 남아있다는 사실을. 그 비밀을. 남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남자는 지금 그 무저갱 바로 앞에 서있다. 그리고 무저갱에 스스로 몸을 던지고 끝없는 밑까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이라면 끌어올릴 수 있다. 남자가 손을 내밀면, 지금은. 아직. 하지만 소년이 그 남자의 손을 잡을까. 어쩌면, 남은 것 하나 없는 인생에 이제는 미련조차 남지 않았다면. 하지만….

"일어나. 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을 뻗은 남자의 손 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소년의 피로 얼룩진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깨끗한 제 손이 조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당신이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못 해. 그러니까 당신은 살아. 만약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살아야 해. 남자를 제 등 뒤에 두고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소년이 나직하게 중얼였었다. 그래. 그랬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이를 드러내고 보이는 모든 것을 물어뜯는 사냥개의 눈빛을 한 소년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너의 주인일까. 그 언젠가, 조금은 까마득히 먼 어느 날 누군가는 이들을 미친개라 불렀다. 물어뜯고, 늘어지고, 숨통을 조이라고. 그 후에는 사냥 끝에 지친 사냥개들을 복날이라며 잡아먹으려 들기 바빴다. 그러나 남자는 달랐다. 남자는 그만큼 모질지 못했고, 그만큼 정이 없지 못했다. 남자는 상처입은 짐승을 두고 돌아설 만큼 매정치 못했다.

"……두고 가."

 소년의 목소리가 무겁다. 남자는 아무런 말도 않고 소년을 바라본다. 남자가 소년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저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제 삶을 뒤흔든 판에 뛰어든 이래로 남자는 단 한 번도 멈춰선 적이 없다. 멈출 수 없으니 당연했다. 멈추면 뒤쳐졌고, 뒤쳐지는 순간 찔리고 밟힐 것이 분명했다. 남자는 살기 위해 멈출 수 없었고, 복수와 신념을 위해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끝난 지금, 안도감과 뒤섞인 기묘한 허탈함이 남자를 떠나지 않고 어깨를 짓눌렀다. 정말 끝인가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제가 믿는 정의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낸 것에 벅차기도 했다. 아니, 기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지. 그리하여, 그러다가도 이제서야 우두커니 설 수 있음을 꺠달은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 하는, 그런 마음이 아가리를 벌리고 저를 덮치려 들어서. 제게도 그러한데 소년에게는 어떻겠는가. 아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깊은 것이 소년의 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년 역시, 알고 있을 테지. 그렇기에 더욱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가자."

"……"

"…같이, 가자."

 남자는 묻고 싶었다. 네 기억 속에서, 같이, 라는 단어가 통용되던 순간은 언제였느냐고. 그 작고 어두운 방에서 홀로 지냈을, 누군가의 밑에서 대신 죄를 등에 업고 가슴에 주홍색 낙인을 단 채 한 평 남짓 음습한 방 안에서 창 밖만을 노려보았을 그 순간에도 홀로였을 너는. 알량한 동정심이라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맞을지도 모르니까. 알량한 동정, 얄팍한 연민. 구차한 자기 위로. 너에게 손을 뻗음으로써 내 자신을 위로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하지만.

"한강주."

 지금 네 눈빛이 내게 말하고 있다.

 나를 데려가 줘.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줘.

"나는, 사냥이 끝났으니 복날이라며 사냥개 잡아먹는 짓 같은 거, 안 합니다."

 때문에 남자는 부러 어설프게 웃어보인다. 등 뒤에서 보호받았다 하더라도 온전히 걸어나온 것은 아니었던 터라 터진 입가며 눈가가 쓰라렸다. 그러나 남자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버려진 개를 안심시켜 경계심을 풀기 위해 지어내는 억지 웃음과도 비슷해 웃음을 짓는 남자는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내가 여기서, 너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며 함께 가자 할 수는 없잖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너와 함께,

 살고 싶으니까.

 남자의 눈시울이 일순 붉어진다. 눈가에 열이 오른다. 마음을 한 꺼풀씩 벗겨낼 수록 연약한 속내가 드러난다. 그래. 거창한 이유 모두 다 집어 치우고, 이제는 쉴 때가 됐다. 우리. 너무나도 가파르고 거친 길을 쉴 틈 없이 달리기만 했다. 이쯤 되면 우리도 음습한 이끼 천지에서 벗어나 햇볕을 쬐어도 되지 않을까. 너무 오래 빛을 받지 못해 양지를 잊어버린 너라면, 나라도 좋다면, 괜찮다면 내가 너를 이끌고 양지로 나가 두 다리 편히 쉴 수 있게 해줄테니까.

"한번 주운 개는 끝까지 책임져요. 난."

 그러니까 당신 내가 책임지겠다고. 차마 가다듬을 새도 없이 떨림을 가득 채워 나온 목소리에 소년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울 것 같은 눈을 한 주제에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다. 소년은 남자가 꼭, 제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남자 본인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딱지가 내려앉은 입가에 시선이 닿으니 소리없는 탄식이 흘러나올 것 같다. 당신만큼은 완벽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는 다르게 깨끗한 손을 차마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미친개를 사냥개로 만들어 달려들 수 있도록 목줄을 풀어준 것이 그였다. 나를 미친 개새끼가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 준 단 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다. 그런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일어나 누구의 목덜미든 물어뜯을 자신이 있다. 소년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 코, 입, 부드런 입매와 가는 턱선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을 듯 눈에 담았다. 남자는 저와 같은 곳에서 달리기에는 너무 연약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잘 지켜야 했는데.

"한번 쓰고 버려질 개 하지 말고, 앞으로도 내 등 지킬 사냥개. 그거 하자고, 너. 언제까지고 내가 길러줄 테니까."

"…비겁해. 당신."

 그런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게 아니야. 적어도 내 눈을 바라보면서 말할 거였으면.


 너,

살면서 나는…… 살면서 나는…… 그런 말 좀 하지 마 죽었으면서 / 김소연, 사랑과 희망의 거리


 살았어야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강주가 비틀이며 한 팔로 벽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눈 앞에 아무도 없는 현실은 여전히 어둡고 음습하다. 어설프게 웃어보이는 입매도, 눈물을 함뿍 머금고 있는 눈가도, 펜 잡을 법한 손가락에 잡힌 굳은 살을 제외하면 유난히도 길고 곧았던 손도 없다.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 노진평.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잖아. 처음부터 당신은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그저 당신의 사냥개 중 하나였고, 어쩌면 당신은 나를 그저 한 마리의 미친개로만 봤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당신을. 나는. 흐, 바람 빠지듯 헛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킨 강주가 벽을 더듬거려 피묻은 야구 배트를 손에 쥐었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나의 달음박질도, 당신의 유지遺志도.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는 계속 달려야만 한다. 무릎이 꺾이고 발이 죄 찢어져도 나는 달려야만 할 것이다. 

 노진평.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었잖아. 그냥, 사냥개와 목줄을 틀어쥔 주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지켰던 그 모습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가세요. 이제 목줄 틀어쥘 주인을 잃은 사냥개가 날뛸 차례다. 그러니까 더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요. 그냥, 그냥. 내가 또다시 모든 것을,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끝냈을 때, 아니면, 내가 가쁜 숨을 거둘 때… 그때 내 앞에 나타나요. 그때 다시 내 목줄 틀어쥐고, 억지 웃음이라도 좋으니 웃으면서, 나를 어디로든 데려가 줘.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갈테니. 어디든 당신 뒤에 서서 당신을 지킬 테니. 내가 처음부터 배운 것이 그것이었으니 마지막까지도 그러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나를 두고 가.

 당신의 끝을 내가 마무리지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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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후진평 / 그 남자의 출근길  (0) 2017.12.21



그 남자의 출근길

허일후 x 노진평

준희



 노진평, 그 남자.

 전 서울지검 소속, 현 서원지검 소속 평검사. 그리고… 우제문 부장검사 밑에서 팔자에도 없는 동분서주를 하느라 하루하루가 고된 대한민국의 소시민 중 하나. 아무리 인생이 제멋대로 흘러간다지만 기획통하고는 너무 거리가 멀지 않나. 그것도 그런 상사 밑에서. 번듯한 사무실도 아니고 20분에 한 번씩 지하철이 지나가는 열악한 근무 환경까지… 뭐, 이렇게 불평을 하는 이유는 그저 지금이 아침 출근길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진평 역시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상사와 제 처지 욕을 하며 졸음을 어떻게든 몰아내고 있었다.

 안그래도 매일이 고단한데 지옥철 안에서 앉지도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 가느니 일찍 일어나겠다 싶은 마음에 아침잠을 줄여가며 일찍 나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역 두어 개를 지나니 들어오는 사람들이 저마다 머리와 옷을 털며 들어오는 것을 보아하니 눈이 오는 게 분명했다. 워낙 변덕스러운 날씨니 아침에 싸리눈이 내리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지만, 역을 조금 더 지나쳐도 들어오는 사람들의 볼이 발갛게 언 것을 보니 제법 눈이 많이 내리는 모양이었다. 아, 이건 좀 큰일인데. 우산도 없고… 역에서 내려도 사무실까지는 조금 걸어야 하는데. 역세권이면 뭐하나, 지하철하고만 드럽게 가깝지. 그 사무실. 차라리 서원지검이었다면 첫 출근 날처럼 택시라도 타지. 애매하게 가까우니 택시를 타기도 아까운 거리다. 하여간 수사관님 참….

 그래. 아무튼, 눈이 온다. 정말 겨울은 겨울이다. 진평은 지상으로 올라온 지하철의 바깥 모습을 바라보며 그제서야 겨울을 실감했다. 지상에 위치한 역인지라 역사에 눈이 쌓이진 않아도 내리는 눈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거 참, 예쁘게도 내린다. 바람 한 점 없이 하늘이며 내리는 눈송이가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도 제법 굵다. 이정도면 정오까지는 내리려나. 사무실 사람들, 귀찮다고 짜장면 시켜먹기 일쑤인데 배달 시키기도 미안하려나, 물론 그 사람들은 그런 거 신경도 안 쓰겠지만, 하는 생각들을 하니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듯 소리없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진평은 고개를 돌려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 인간들이 어느새 익숙해졌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말이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해도 어, 왔냐, 하고 대충 답하는 하는 직속 상관이 있고, 인사는커녕 꼬나보지 말라며 승질만 안 내도 다행인 또라이 형사가 있고, 가장 어린데 귀염성도 없고 오히려 같이 있으면 무섭기까지 한 놈이 하나 있고… 취소. 하나도 안 익숙해졌다. 생각하니 더 출근하기 싫어져 진평은 쿵, 철제 봉에 머리를 박았다. 인생이 참 험난하다. 출근하기 싫다.

 서늘한 봉에 이마를 대니 그나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아 눈을 꿈벅인 진평이 문득, 나머지 하나를 떠올렸다.

 "… 커피 마시고 싶다."

 그 남자의 커피, 별 것도 아닌. 그게 뭐라고 지금 갑자기 생각이 날까. 


허일후, 그 남자.

 전 동방파 간부,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없는 인남동의 어느 변두리 식당 주인. 일명 허사장. 김치찌개가 제법 맛있는 곳. 사무실로 출근하기 전 2층의 제 집에서 내려와 가게 안을 살핀 일후가 문득 (새로 설치한)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침 해가 그리 밝지 않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를 보아하니 꽤 굵은 것이 제가 사무실에 갔다가 돌아오면 꽤 쌓여 있을 것 같은데, 가서 하는 일이 제법 거칠게 몸을 쓰는 일이라 가게 앞 눈을 쓰는 게 귀찮은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잠시 유리문을 열고 바닥에 던져진 오늘자 신문을 집어든 일후가 눈 위에 얇게 쌓인 눈을 탁탁, 털어내고 의자를 끌어와 눈 내리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따금 주방 너머에서 작게 울리는 달그락, 하는 소리 이외에는 눈 쌓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었으나 일후는 그 정적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삶이 지금까지 난장판과 비명의 연속이었으므로.

 신문을 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그가 동방파에 몸을 담고 어느정도 조직원들의 인사를 받는 위치에 올라왔을 때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그의 전 오야의 버릇이기도 했다. 형님. 우리 같은 놈들이 아침마다 신문 꼬박 읽어 뭐 합니까. 형님도 참 성실하십니다. 하며 웃자 그는 신문을 곱게 접어 내려놓으며 일후에게 답했다. 

- 일후야. 그런 생각을 하면, 아무리 너 몸 담은 곳이 큰 물이래도 너는 그 안에서 삼류밖에 안 되는 거다. 주먹 휘두르면서도 존경 받고 싶으면, 힘들다고 불평 말고 뭐라도 머리에 집어넣어. 어쩌다 이곳 흘러들어왔다만 너도 입 다물고 그리 차려입고 있으면 주먹 쓰는 놈이라는 거 알기 힘들 정도로 말쑥하니, 책 읽고 신문 읽어 머리도 키워라. 이제. 몸은 적당히 키웠잖냐. 그렇지? 그게 네가 주먹 쓰는 놈이라고 돈 많은 놈들한테 무시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날부터 일후 역시 오야를 따라 눈에 들어오지 않는 신문을 읽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바스락이는 것은 종이고 촘촘한 것은 글자다 싶던 신문의 내용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글자를 머리에 담는 것이 익숙해지니 세상이 보였고, 세상이 보이니 생각이 깊어졌다. 주먹부터 휘두르던 천성도 어느새 고쳐졌다. 아주 시간이 흐른 어느 날엔가 오야가 그리 말했다. 봐라, 넌 터를 여기에 잡긴 했어도 제법 쓸만한 놈이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괜찮거든. 하고. 1면부터 차근히 살피며 기사를 눈에 담던 일후가 문득 아주 먼 언젠가를 떠올리고 픽 웃었다. 그렇게 몸에 밴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형님은 제가 이렇게 될 것까지 보이셨습니까. 묻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그저 신문을 접고 다시 밖을 바라보는 수밖에.

 그러다 문득, 그가 떠올랐다.

"역에서 사무실까지 좀 걸어야 할텐데…"

 그 남자. 말쑥하고, 가늘고,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검사. 노진평. 지금은 이래저래 익숙해진 것 같다만 처음에는 얼떨떨하니 끌려다니기만 하다 쨍하니 소리를 지르는 게 제법 성깔 있는 놈이다 싶었다. 물론 성깔만 있고, 펜대만 잡은 사람이라 주먹 못 쓰는 건 당연하고. 그래도 험한 사람들 속에서 꽤 심지 굳게 자기 자리 지키는 걸 보니 그 역시 우제문의 말대로 사연이 좋거나 쌓인 게 많거나 할 듯 싶었다. 물론 그의 사정은 안다. 창준이형, 창준이형, 몇 번인가 말했으니. 그 전의 이야기도 알고. 하지만 전해들은 것과 직접 듣는 것, 그리고 직접 경험하는 것은 크게 다르므로 제가 그 사연의 좋고 나쁨을 감히 결정할 수는 없을 테다. 그저, 이제는 거친 현장과 사무실 출근이 익숙해진 듯 해 보이는 그 검사에게 저 나름 친절하게 대해줄 뿐.

 때문에 지금 눈 내리는 모습을 보니 진평이 떠오른다. 우리 중 유일하게 정장을 갖춰 출근하는 사람인데, 우산은 챙겼으려나. 그 사람 보아하니 차도 없는 것 같고. (막 전입한 평검사니 더 그럴 것이다, 아마.) 시간을 확인한 일후가 몇 장 읽지 못한 신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은 출근 전에 식당 앞을 좀 쓸어두고 가려고 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겠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할 일이 있으니. 



 그리고, 지금.

 "…허사장님?"

 사박하니 곱고 굵은 눈이 하늘이며 내려오는 인중역 계단 앞, 마주친 두 남자.

 인중역 계단을 올라오니 역시나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서 긴 한숨을 내쉰 진평이 가죽 가방을 차마 머리에 쓰고 갈 순 없어 누가 두고 간 신문이나 남은 일간지라도 없을지 주변을 살피던 참이었다. 구시가지인지라 인중역에는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별로 없다 보니, 안그래도 신문이 귀한 시기에 어쩌면 당연하다는 듯 신문은커녕 종이 쪼가리조차 보이지 않아 절망하며 사무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침 사무실 가는 길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우산을 안 가져오셨을 것 같아서."

 우연히 사무실 사람을 만난대도 신 수사관님이나 부장님일 줄 알았지, 저 사람일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하지 못했던 듯 진평이 눈을 둥글게 뜬 채 한참이나 제 앞에 선 일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반응도 예상했다는 듯 일후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지만, 여즉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진평은 그저 눈을 꿈벅이기만 할 뿐이다. 이 사람 참, 놀라는 모습이 한결같은데 이상하게 질리지가 않는다. 속으로 좀 더 웃던 일후가 어깨를 으쓱이며 제가 쓰고 있던 우산을 흔들었다. 안 가십니까? 사무실. 하며.

 "예?"

 "출근은 하셔야죠."

 "아뇨. 그게 아니고. 우산"

 이런 말 하긴 정말 죄송한데, 우산… 하나만 가져오셨습니까? 하는 머쓱한 물음에는 제법 뻔뻔하게 고개를 기울여 보인다. 혼자 살다 보니, 우산도 하나면 충분해서. 그래서 눈 다 맞고 사무실 들어가실 겁니까? 수트 아깝게. 쪽팔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색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묘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조금 더 짓궂어지는 기분이라 일후는 잠시 긴 숨을 내쉬었다. 어설프게 친한 사이에 괜히 놀려서 뭐 하자고. 사실 우산이 하나 뿐인 것도 맞다. 혼자 사는 집에 어디서 선물 받지 않는 이상 우산을 또 살리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저같은 사람은. 물론, 차가 있어 우산 쓸 일이 별로 없었지만… 제 차는 사무실 근처 공용 주차장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고, 이 사실은 진평이 알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걸 물어볼 생각도 못하는 것 같고, 지금은.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제법 큰 검정 장우산 아래에 둘이 나란히 서 사무실을 향해 걷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역세권이라고 몇 분 걸으니 바로 당구공 스티커 크게 붙은 건물 입구가 보인다. 제문과 성철, 필순이 (성철은 좀 의외지만) 거의 사무실 문을 여는 편이니 들어가면 셋 중 하나는 먼저 앉아 TV를 보고 있을 터였다. 곤란한가? 사실 일후에게는 아니었으나 진평은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후는 시선을 슬쩍 돌려 진평을 바라보았다. 찬 공기에 의해 조금 붉게 물든 뺨. 이제 거의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뺨과 턱의 상처. 그래, 기획통 꿈꾸던 검사님에게는 안 어울리는 상처이긴 했지. 그러나 발간 뺨이나 숨 쉴 때마다 희게 흩어지는 입김 같은 것은…… 그가 검사여서가 아니라, 그냥, 괜히 어울리는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단 일후가 다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주 잘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진평이 일후를 바라본다. 다부진 옆선이지만 단지 그뿐이지, 그렇게 주먹을 쓰는 사람일 줄은 몰랐었다. 지금에야 그가 현장에서 주먹 휘두르는 것을 보고 또 봤으니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지만 처음엔 정말 그랬다. 이런 사람을 보고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단 말이지, 내가. 헛웃음이 날 것 같은 기분에 진평이 입꼬리만 희미하게 올린 채 그를 조금 더 바라보며 걸었다. 진평은 문득 그가 궁금해졌다. 개괄적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알고 싶은 것은 조금 더 다른,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주먹 쓰는 사람답지 않은 다정한 말투? 여유가 있을 때마다 신문을 보는 곧은 등? 그도 아니면, 커피를 내리고 타는 손길? 아. 그러고 보니, 커피. 아까 지하철 역에서도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났었지. 진평이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향했다. 어느새 사무실 건물 앞이다. 

 너나할 것 없이 입구에 멈춰선 둘이 잠시 서로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진평의 시선은 조금 어설프게 아래로 치우쳐 있고, 일후의 시선은 그런 진평의 얼굴로 곧게 향해 있다. 참 예상이 간다. 이 남자는. 시선까지도. 어깨를 으쓱인 일후가 입구를 고갯짓했다. 보아하니 어색해 어쩔 줄 몰랐을 거다. 같이 들어가면 더 질겁하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검사님, 혹시 불편하면 먼저…"

 "들어가면 커피 좀, 타주세요."

 "네?"

 허사장님 커피, 꽤… 맛있더라구요. 그러니까. 그럼 저 먼저 들어갑니다. 다급히 뒷말을 덧붙이고 우산 아래에서 얼른 나와 사무실 계단으로 달려 올라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검은 장우산에서는 사박이며 눈 내려앉는 소리가 울리고, 희미하게나마 계단 달려 올라가는 소리가 울린다. 발을 헛딛기라도 했는지 악, 씨! 하고 소리치는 것도. 허… 참. 생각보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사람이었네, 저 검사님이. 찬 공기에 흰 입김을 내쉬며 잠시 너털웃음을 지어보인 일후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우산을 접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사람이고,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도 있고. 곱게 눈이 내리기에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지하철 역 마중을 나가 보길 잘했다 싶고.

 그러니, 당분간은 가게에서 나서는 시간을 좀 당겨도 괜찮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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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새벽이 될 때까지 정문의 작은 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매서운 겨울 바람은 허술하게 창틀에 끼워맞춰진 얇은 유리창을 부술 듯이 때려댔고, 흔들리는 창틈으로는 칼날처럼 매서운 동장군의 한기가 비집고 들어와 방 안을 제 맘껏 휘돌았다. 가운데에 정문이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시선만 앉은뱅이 책상에 고정한 정문은 느리지만 빠르게 원고지의 칸을 채워가고 있었다. 단정한 글씨 하나하나가 흔들림 없이 종이 위에 몸을 누일 , 이번에는 겨우 걸쇠 하나로 잠궈두었던 문이 덜컹, 하고 제법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정문은 마치 일상적인 것마냥 글을 써내려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겨울이면 으레 들려오는 친숙한 소음이었다. 오히려 연필심과 원고지가 부딛치는 소리 이외에는 너무도 조용한, 작은 칸의 정적을 깨트리는 고마운 소리이기도 했다. 이렇게 번을 덜컹거리면 바람도 멎고, 덜컹이는 수를 머릿속으로 헤아리면 밖에는 해가 날이 밝아오리라.

 

 아직 어둠이 내려앉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창밖을 잠시 곁눈질하던 정문의 뒤로 다시 문이 덜컹였다. 덜컹, , . 정문이 연필을 내려두었다. 문을 때리는 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미묘하게 다른 무게에 정문이 느릿하게 몸을 반쯤 돌려 현관을 바라보았다. , 한번 문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소리는 잠잠해졌으나 주변에 제법 예민했던 정문은 밖에 아무도 없는 기척을 죽이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나을까 생각했지만, 맞물리지 못해 바람이 새어드는 문틈으로 들려오는 희미한 숨소리는 온전한 이의 것이라기엔 꽤나 가쁘고 힘겨웠다. 누가 시간에 저를 찾았는지 기억을 더듬어도 길이 없어 정문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음을 걸어 문짝의 잠금을 풀었다.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정문은 밀려들 바람에 잠시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에 얼어버린 냉기가 뺨을 때리듯 매섭게 정문을 휘돌았고 잠시 눈을 가늘게 그는 소리의 근원을 찾듯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금 거칠은 숨소리가 들렸을 , 그는 작은 쪽방의 바깥벽에 기대어 앉은 남자를 보았다. 고개를 숙인 탓에 보이는 것은 짧은 머리뿐이었으나, 틀어쥔 옆구리와 셔츠에 검게 배어나온 핏물,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그의 대부분을 설명하고 있었다. 제법 귀찮게 되었고, 다른 의미로 난감하게 되었다. 문을 닫지도 그를 부르지도 못한 가만히 문고리를 붙잡고 있던 정문을 향해 남자가 삐걱이며 고개를 들었다. 와중에도 찡그리듯 웃으며 정문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정문은 대답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찰을 돌러 테다. 여러모로 곤란해지느니 무어라도 일단은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싶어 정문은 따뜻하진 못한 손을 그를 향해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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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은 일부러 떠나온 날을 기억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택은 자신의 병실 안에 그 흔한 TV도, 달력도, 심지어 라디오까지도 두지 않은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책을 읽고, 산책을 하고, 같이 입원한 이들과 바둑을 두고, 그러다 침대 헤드에 기대 누워 음악을 들으며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는 것이 택의 일과였다. 제 삼자의 눈으로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그 사이클을 스스로 선택한 택은 생각보다도 오래, 그리고 꿋꿋하게 시간을 흘려냈다. 원래 핸드폰이나 TV같은 전자 기기와 친한 녀석이 아니니 평소와 그렇게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택과의 연락을 이어가는 덕선과 동룡이 보기에는 그만큼이나 답답하고 또 속상한 모습이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택의 병실을 찾아가는 동룡은 그런 택을 위해 부러 더 크게 웃고 크게 떠들었다. 그럴 때마다 택은 여느 때처럼 고요하게 웃었다. 하지만 택이 아무리 예전처럼 웃어도 점점 더 야위어가는 어깨와 마른 뺨은 숨길 수 없었기에 덕선은 돌아오는 길마다 매번 울음을 참았다. 언니, 나 진짜 택이 볼 때마다 속상해서 죽을 것 같애. 어떻게 해. 언니. 그냥, 그냥 말해버릴까, 그럴 때마다 보라는 왈칵 화를 내는 대신 덕선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게 걔가 선택한 최선인 거야. 넌 괜히 참견하지 마. 걔는 지금 아주 열심히 견뎌내고 있는 거야. 

 


2.


 뇌종양이라고 했다. 아니, 걔가 뭘 했다고 뇌종양이에요? 얘 술도 거의 안 마시는 애예요. 담배는, 담배는… 담배는 그래도 그렇게 많이 피운 것도 아니에요. 근데 대체 얘가 무슨, 뇌종양이라뇨. 선생님! 다시 좀, 검사 좀 해 보시라구요, 잘못 보신 걸수도 있잖아요!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의사에게 따져대는 선우의 양 팔을 붙잡은 것은 다름아닌 택과 선우의 아버지였다. 이미 선우와 택의 어머니는 진주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은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고, 선우는 그런 제 어머니와 여동생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울컥하는 마음을 숨길 길이 없어 붙잡힌 팔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되잖아요! 하지만 격양된 시선이 제 아버지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선우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야 말았다. 그런 선우와 그의 아버지를 바라보던 의사는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저희도 안타깝습니다, 나지막하게 중얼이며 자리를 피했고 선우는 망연자실한 표정과 함께 손을 떨궜다. 그러자 아버지 역시 붙잡았던 손을 거두었다. 선우의 내리깐 시선 끝에 그의 미세하게 떨리는, 그 떨림을 차마 감추지 못하는 제 아비의 손끝이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흐, 하는 울음이 절로 터져나와 선우는 손톱이 제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세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볼품없이 갈라지고 젖어든 목소리를 내었다. 알고, 계셨던, 거죠. 아버지. 엄마두요. 그러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울음소리를 내며 진주를 더욱 끌어안았고, 꿋꿋하게 참던 진주도 결국은 제 어미의 품을 파고들며 훌쩍거렸다. 하, 선우는 그대로 헛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뇌종양이라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왜 택이가. 순식간에 눈 앞이 뿌옇게 젖어들었다.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한참이나 가만히 서있던 아버지가 짜내듯 중얼거렸다. 아빠가, 미안하다. 

 


3.


 천재 바둑기사 최택은 조용히 은퇴를 알렸다. 많은 이들이, 수많은 팬들이 그의 은퇴를 믿지 못하고 아쉬워했지만 택은 그 어떤 후속 입장 표명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자신의 자취를 지워버렸다. 선우와 덕선, 동룡의 친구들 중 그들이 택과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집요하게도 택의 향후 거취와 은퇴 이유를 물었지만 셋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예 입을 열지를 않아버리니 주변인들은 그저 사정이 있나보다 하며 결국 저들이 먼저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셋은 부쩍 만나는 시간이 많아졌다. 물론 의대생인 선우는 그 중에서도 빈도가 조금 낮긴 했지만, 적어도 덕선과 동룡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를 만나고, 선우와 택의 집을 찾았다. 덕선은 비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기념품이든 무엇이든 들고선 택과 선우의 집을 찾아갔고, 동룡은 택과 선우의 집을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다. 그나마 선우마저 없을 때 진주가 아무리 애를 써도 고요하고 음울하기만 한 집은 둘 덕분에 그나마 생기를 되찾는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가끔 텅 비어버린 택의 방에 셋이 둘러앉을 때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둘의 빈 자리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둘 없다고 이렇게 방이 커 보이냐. 동룡이 중얼거리면 선우는 무릎을 모아 앉으며 턱을 괴었고 덕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정환이한테는 말 안 할 거냐? 택이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지. 어차피 알아도 걔는 못올 거 아냐. 휴가 받을 때까지. 선우가 뒤늦게 입을 열었지만 덕선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차피 걔도 정봉이 오빠랑 아줌마 아저씨한테 대충은 들었을 거야. 정 궁금하면 자기가 알아서 가겠지. 그리고 택이가 김정팔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랬어. 그러니까 너네도 하지 마. 절대로, 절대로. 택이가 특별히 부탁한 거야. 제발 말하지 말라고.

 


4. 


 택아. 우리 왔어. 오랜만에 시간이 겹친 선우와 동룡, 덕선이 택이 입원한 병실 문을 열었다. 택은 베개를 몇 개 받쳐둔 채 침대 헤드에 기대어 귓가에는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야, 최택. 우리 왔대니까. 앞서서 들어온 선우가 가져온 과일들을 협탁에 올려놓고 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제서야 택은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 내려놓으며 선우와 다른 이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왔어? 미안. 서글하니 웃는 모습이 또 얼마 전보다 더 수척해져 있어서 아릿해지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덕선이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이번엔 누구한테 꽂혔어? 협탁을 열어보며 어느새 수북하게 쌓인 CD들의 앨범 케이스를 찬찬히 살펴보던 덕선이 돌아오는 답이 없자 조금은 멀뚱히 택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자신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던 듯 금새 시선을 마주친 택이 애매한 표정을 지어보였고, 이번엔 누구한테 꽂혔냐니까. 왜 말을 안 하냐? 물으니 그제서야 아, 하고 웃었다. 이승환. 요즘에도 책 많이 읽고? 하긴, 여기서 그거 아니면 할 게 뭐가 있겠냐만은. 져지 주머니에 양 손을 꽂은 채 주변을 돌아다니던 동룡이 중얼거렸고, 택은 여전히 덕선을 바라보며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룡에게 돌아가는 답은 없었다.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그런 택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가 입술 안쪽을 지긋이 깨물었다. 야. 최택. 그러나 택은 듣지 못한 것처럼 여전히 덕선의 모습을 주의깊게 살피고 있었다. 야, 최택 저거 또 덕선이한테만 신경쓰는 거, 하고 대수롭지 않은 듯 장난스레 말하던 종룡의 말을 중간에 끊은 선우가 그대로 택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놀란 택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선우를 정면으로 마주보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선우가 택의 어깨를 쥔 양 손에 힘을 준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 언제부터 소리 잘 안 들리기 시작했어. 덕선과 동룡이 놀라선 그대로 둘을 돌아보았고, 택은 결국 어설픈 웃음을 짓고 말았다. 

 


5. 


 덕선아. 정환이는 아직 모르지. 나 여기에 있는 거. 나긋한 택의 물음에 덕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사람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하는 아이였지만, 청력을 조금씩 잃어가며 택은 부쩍 사람의 얼굴과 눈을 주의깊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마 입모양과 표정으로 하는 말을 유추하기 때문일 것이다. 선우는 그런 택을 볼 때마다 괴로워 고개를 돌렸다. 의대생인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택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역시 선우였기에 그만한 아이러니가 없었다. 가끔 정환과 통화를 할 때마다 그가 택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을 느끼는 선우였지만 그럴 때마다 선우는 대충, 큰 병원에서 좋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며 잘 지내고 있노라고 대답했다. 그다지 심하지도 않다고. 오로지 선우나 제 부모님을 통해서만 택의 이야기를 듣는 정환이었기 때문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아니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택의 부탁이었으니까. 택이 부러 정환에게만 그렇게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아는 것은 아마 덕선과 선우 둘 뿐일 터였다. 이유를 알기 때문에 더욱 답답하고 무거웠다. 하지만 절대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택의 부탁이었다.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형제인 녀석의 부탁이었기 때문에. 

 


6. 


 최택 어디있어. 휴가를 나온 정환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집도 아닌 선우가 다니는 학교였다. 과실에서 동기들과 커피를 마시고 있던 선우를 무작정 끌고 나온 정환은 으르렁대듯 선우에게 날선 목소리를 내었다. 알아서 뭐하게. 걔 우리 교수님 계시는 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있어. 넌 휴가 나오면 집에나 갈 것이지 옷도 안 갈아입고 왜 여기로 오는 건데. 애써 무던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선우의 모습에 허, 기가 차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던 정환이 그대로 선우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씨발, 내가 병신 호구로 보이냐? 니가 계속 그렇게 둘러댄다고 내가 아 그렇구나 할 줄 알았냐고. 어? 지랄하지 말고 최택 어디 있는지 말 하라고!! 정환의 고함에 과실 안에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복도에 서 있던 학생들도 흘끔거리며 둘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환은 아랑곳않고 선우를 몰아붙이기에 바빴다. 입술을 짓씹던 선우는 대답 대신 제 멱살을 틀어쥔 정환의 손을 붙잡아 떨어트렸다. 야. 김정환. 사람들 보는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미쳤냐? 평소보다도 더욱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내가 말하면. 뭐. 니가 찾아가기라도 할 거냐? 그러면 씨발, 당연히, 그러나 정환의 말을 가로챈 선우가 서늘한 눈으로 정환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택이. 생각보다 심각해. 청력은 거의 다 손실됐어. 우리가 갈 땐 웃는데, 어떻게든 웃는데, 그런데도 힘들어하는 게 눈에 다 보여. 니가 그런 택이한테 가서 뭘 어떻게 할 건데. 너는 알고 있잖아. 왜 택이가 너한테만은 자기 어디 있는지 말 못하게 하는지. 너 거기 가면. 김정환. 택이 두 번 죽이는 거야. 넌. 이 개새끼야. 

 


6-1.


 꿈을 꾸었다. 정환에게 제 마음을 털어놓던 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정환아. 너야. 술기운에 느릿이 눈을 깜박이던 택은 길게 흩어지는 입김과 함께 꾹꾹 눌러만 왔던 제 마음을 꺼내놓았고, 인적 드문 길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던 정환은 택의 고백을 들은 후에도 한참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 앞이 아른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택은 그 정적에 오히려 일말의 희망마저 떨쳐낼 수 있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정환아. 그리고 택이 정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정환은 그 자리에서 튀어나가듯 벌떡 일어나 섰다. 꽉 쥔 주먹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택은 부러 눈을 뜨지 않았다. 입꼬리는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지만 그것이 기쁨은 아니었고, 홀가분하긴 했지만 안심이 되는 것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답을 할지 예상할 수는 있었다. 한참이나 추운 공기 속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정환이, 어렵게, 짜내듯 한 마디만을 한 후 택을 둔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최택.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그리고 감은 눈에서부터 택의 뺨을 타고 한줄기 눈물길이 새겨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택은 그 날의 그 벤치가 아니라 익숙한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역시 꿈이구나. 결말조차 달라지지 않은 그런 야속한 꿈. 택은 링거 바늘을 꽂지 않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그 날의 꿈을 꾸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나마 정환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그건, 이건, 생각만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정말로 두렵고 무서운 것은, 시간이 흘러 조금씩 변해갈 목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택 자신이 기억하는 정환의 목소리는 그 날의 사늘하고 매몰찬 한 마디가 마지막이라는 것이 두려웠다. 

 


7.


 병실 출입문의 창문으로만 흘끗 넘겨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의 모습이 전에 비해 훨씬 더 수척해졌다는 사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문 손잡이를 굳게 잡은 정환은 한참이나 그런 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창문을 넘겨보며 이어폰을 귀에 꽂은 택의 뒷모습이 제게 묻는 것 같았다. 정말 들어올 거냐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들어오려 하느냐고. 물론 택의 병이 제 탓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정환은 결국 문 손잡이를 놓은 채 병실 벽에 기대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매몰차게 최택을 버려놓고, 그 후로도 한 번도 최택을 만나지 않은 주제에, 오히려 최택을 피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어떻게 그 녀석을 보려고. 역시 돌아가야 할까, 선우의 말처럼. 입술을 짓씹던 정환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다 신경질적으로 손을 떨군 채 되돌아가려던 찰나. 

 

“정환아.”

 

 병실 안에서 희미하게 울려퍼진 목소리는 분명 택이었고, 분명 정환의 이름이었다. 놀란 정환이 고개만 돌린 상태로 걸음을 멈추었다. 정환아. 다시금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나왔다. 너무나도 가늘고 유약해서 금방이라도 뚝, 끊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 정환은 다시금 입술을 짓씹으며 아주 조심히, 그리고 천천히 병실 쪽으로 걸어가 병실 창문 안을 곁눈질했다. 택은 창 밖이 아닌 정면 쪽을 향해 있었지만 시선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김정환. 또다시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정환은 못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서서 택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택은 연거푸 정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정작 택 본인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목울대에서부터 퍼지는 희미한 진동만이 제가 무어라 소리를 내고 있음을 알리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환이라는 이름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채 뭉뚱그러지는 소리의 덩어리인지 알 수 없었다. 택은 그 사실이 못내 힘겨웠다. 가지런히 모은 채 맞잡은 제 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한 손을 들어 제 목에 가져다 대었다. 김정환. 진동이 손끝을 타고 퍼져나갔지만 여전히 어떠한 단어를 만들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니 덜컥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목울대에 얹었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힘주어 파고들면 조금이라도 더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절박함은 들을 수 없는 귀에 대한 원망과 서글픔으로 변질되었다. 택은 링거 바늘이 꽂힌 나머지 손으로 제 한쪽 귀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손톱을 세워 뜯어낼 듯 꽉 쥐었다. 들리지 않는다.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때에도 이처럼 비참하지는 않았었는데. 그랬는데. 결국 택은 여윈 몸을 옹송그리며 양 손에 힘을 주었다. 링거 호스에는 역류하는 피가 조금씩 배어들었고, 볼품없이 마른 손은 스스로 기도를 졸랐다. 후두둑, 흰 이불 위로 눈물이 요란하게 떨어졌다. 아, 아, 아아…… 울음 섞인 쇳소리가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뇌종양이라는 사실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에는 어땠더라. 그 때도 지금처럼 모든 것이 원망스럽진 않았는데. 그 어떤 상황도 지금만큼 비참하고 원망스럽지는 않았었는데. 그랬는데. 감은 눈 안으로 스치는 얼굴과, 정적뿐인 세계에 오롯이 울리는 그 목소리에 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깨에 온기가 왈칵, 내려앉았다.

 

 고개를 든 택이 가장 먼저 바라본 것은 희뿌연 시야 안에 가득 들어찬 흰 목덜미와 빳빳한 셔츠, 그리고 검은 제복의 뒷 카라였다. 그리고 희미하게, 이상하게도, 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 것 같았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그새 촘촘이 차오른 눈에서 일렁이던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툭하니 떨어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어야 하는데. 하지만 저를 단단히 끌어안은 몸을 마른 택이 밀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품 안에서 애써 바르작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잠, 깐, 겨우 목소리를 내었지만 제가 생각하는 이의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다. 아까는 그렇게도 몇 번이고 불렀던 이름이었는데도. 지금은 마치 금지된 단어처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이윽고 저를 힘주어 끌어안았던 팔에 힘이 풀렸다. 그리고 양 어깨를 붙잡은 단단한 손이, 여전히 택과의 접점을 유지한 채 서서히 얼굴을 마주했다. 

 

“………”

 

 하, 헛숨을 뱉어내며 울 듯 화를 낼 듯한 얼굴을 한 정환이 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온통 젖어버린 택의 눈이 커지며 정환을 제 시선 안에 가득 담았다.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얼굴을 보는 순간 등 뒤에서부터 소름이 돋았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으며, 그와 동시에 제 몸뚱아리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끝없는 바닥으로 추락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느끼면서도 차마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시야가 흐려짐과 동시에 눈물이 떨어져 맑아지기를 반복했다. ……… 왜, 이렇게, 말랐냐. 안그래도 마른 놈이. 한참의 정적 끝에 정환이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그 순간 아주 잠시, 제 우스꽝스런 목소리를 택이 듣지 못함에 감사했다. 택은 그 순간에도 한 단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정환의 입모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정환과 시선을 마주했다. 정환의 눈가가 불그스름히 물들어 있었다. 어깨를 붙잡고 있던 다른 한 손이 이번에는 택의 뺨으로 향했다. 한 눈에 봐도 떨림을 멈추지 않는 그 손이 택의 뺨 위에 투박하게,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부드럽게 자리를 잡았다. 엄지 손가락으로 눈물길을 쓸어 지웠다. 그러나 눈을 다시 깜박이자 생겨나는 눈물길을 이번에는 닦지 않은 채 제 엄지로 고스란히 받아내었다. 젖은 뺨 아래로도 확연히 느껴지는 마름에 가슴 한 구석부터 찌릿한 통증이 피어났다. 

 

 정환, 아. 그제서야 입을 열어 이름을 부르던 택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두려워졌다. 제가 내는 이름이 온전한지 알 수 없어서 실망할까 두려웠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그래서 저를 피하는 택의 모습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도 더 무겁고 큰 슬픔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정환은 그런 택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환은 그런 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 때처럼 피할 수 없었음을 스스로가 가장 크게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잘 봐. 최택. 목소리를 낮추고, 똑바로 입모양을 보여주며 정환이 택을 제 시선 안에 담았다. 두통 때문인지, 제 상황 때문인지 괜히 웅웅거리는 것 같은 정적 속에서 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환의 입모양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연신 눈물로 담뿍 젖은 속눈썹을 털어내듯 택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긍정의 대답 대신 입을 열어 달싹거리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미안해.

그리고…

보고 싶었어.

 

 

늦게 와서, 미안해. 그 입모양을 읽은 순간 택은 무너지듯 스스로 정환을 끌어안으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정환은 그런 택을 가득 끌어안으며 작은 정수리에 입술을 대었다. 처량맞을 정도로 작은 몸뚱이가 크게 들썩이며 서러운 울음을 연신 흘렸다. 마치 어린 아이가 처음 세상을 만나 커다란 울음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처럼 택은 서럽게 울었다. 정환아. 정환아. 정환아, 환아, 정환아… 울음에 뚝뚝 끊기는 목소리가 연신 정환의 이름을 불렀고, 정환은 그런 택을 품에 가득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늦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때 너를 그렇게 버려두고 가버려서 미안해. 그 후로도 너를 없는 사람처럼 피해버려서 미안해. 너를 미워하노라 말해서 미안해. 내가 그렇게, 상처를 줘서, 용기를 내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택아.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분명 택은 듣지 못할 고해이자 참회였으나 정환은 택 본인에게 직접 말하듯 모든 것을 쏟아내며 그동안 참았던 흐느낌을 터뜨렸다. 그리고 택은 조금 더, 자신의 모든 힘을 쥐어짜듯 그런 정환을 끌어안았다. 무어라 말하는 정환이 무슨 말을 하든 상관 없다. 또한 제가 내뱉는 것이 그의 이름이 아니라도 상관 없었다. 형태조차 알 수 없는 소리의 덩어리일 뿐일지라도 지금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당장 눈을 감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M & LOVE FOR SALE
한 민 우 X 제 이
준 희
 


은혜가 없는 집은 이제 더할나위 없이 적막하고 또 황량하다. 시야를 차단시키는 단단한 벽 대신 곳곳에 서서 벽 역할을 하는 유리 진열장들은 처음 왔을 때에는 독특한 인테리어라며 좋아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안그래도 큰 집을 더욱 크게만 보이게 해서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몇일동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시선을 미세하게 돌려 오른쪽을 보면 마우스 곁 아슬아슬하게 가까운 위치에 자리한 재떨이가 시간이 적잖게 흘렀음을 일러주고 있을 뿐이다. 담배꽁초는 눈대중으로만 세어도 흉하게 구겨진 것이 열댓 개, 불만 붙였다가 떠오른 기억들을 황급히 타이핑하느라 끝까지 타도록 걸쳐둔 것이 다섯 개. 그리고 쌓인 것들의 아래에 깔려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몇 개쯤 되겠지. 이제 하루에 담배를 몇 개피나 피웠는지도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시간은 아주 오래 되었을 수도 있고 생각보다 조금 덜 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그저 글을 쓸 뿐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누가 믿지 않더라도 상관없는 이야기를.
 
나는 사랑을 했다. 아, 이건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리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을 한다.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럴 것이다. 누구는 단 한번의 사랑을 하고, 누구는 수없이 많은 사랑을 한다. 나는 아주 많지도 않았지만 한 번 이상의 사랑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알 수 있다. 나의 모든 사랑의 기원은 내 첫 번째 사랑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사랑은 감히 값으로 매길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랑의 가치! 가치와 사랑이 한 문장 안에 쓰일 수 있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그 우스운 일이 당연시되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연애소설을 읽지 않는다. 아니, 읽더라도 그 수가 현저히 낮아지고 말았다. 연애소설을 통해 얻는 대리만족보다 사랑을 직접 겪는 것이 더욱 생생하고 가슴 떨리기 때문이다. 사랑의 기억. 사람들은 더 이상 흰 종이 위에 고스란히 박힌 검은 글자를 읽으며 눈을 감지 않는다. 사람들은 머리에 구멍을 뚫고, 우스꽝스런 기계를 그 구멍에 박아넣고, 누군가 가슴 절절히 겪은 유일한 경험을 유일하지 않게 만들어버리고 만다. 경우에 따라서는 숭고하기까지 할 두 사람의 연애를 한 사람과 다른 사람들의 연애 체험기로 변질시켜버림으로써 사람들은 스스로의 상상력을 죽여버린다. 읽는 사람에 따라 수천, 수만, 수억 가지의 느낌과 색으로 기억될 수 있을 소설 대신 뉴런처럼 액체 속에서 발버둥치는 기억의 실타래를 선택함으로써. 그리고 그 실타래에 가치라는 것이 매겨지게 된 순간 이래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임에도, 내 사랑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랑을 사고파는 행위에 꽤 염세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람이라 보기엔 우스울 수도 있으나, 미리 밝혀둔다면 나 역시 그 우스꽝스러운 구멍을 머리에 가지고 있다. 물론 단 한 번뿐이었지만 기억을 팔기도 했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나는 그 기억을 내 스스로 팔지 않았다. 흐릿하게 기억나는 과거의 어느 날 은혜는 부모님과 함께 나를 찾아와 병원에 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그들을 따랐지만 그들은 나를 치료한 것이 아니었고, 본인들 입에서는 치료라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내 기억을 빼앗아갔다. 나의 사랑이 마치 치명적인 바이러스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발버둥쳤지만 끝내 벗어날 수는 없었다. 두개골에 구멍이 뚫리고, 두꺼운 바늘이 내 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서,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러브마스터라는 자의 양 손에 내 머리를 통째로 맡기는 것은 그대로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구역질이 났다. 러브마스터의 열 손가락이 내 뇌를 헤집을 때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살려주세요. 안돼. 그만해. 이제 그만해. 아니야. 아니야. 빼내지 마. 그건 안돼. 그 기억은 안돼. 은혜야. 엄마. 아버지. 제발 이 사람 좀 멈춰주세요. 은혜야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은혜야 그 기억만은 안돼 내가 잘못했어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 애를 만나지 않을게요 기억만은 가져가지 않게 해주세요제발부탁입니다그냥혼자기억만하고있을게요제발그애를잊지않게해주세요그애혼자감당하기에는너무버거울거예요아닙니다제가잘못했어요얼굴만이라도기억할수있게해주세요그거면돼요다시는말하지않을게요은혜랑평생행복하게살테니까제발어머니아버지은혜야나좀살려줘안돼제이
 
…… 아무튼. 나는 그렇게 내 사랑을 강제적으로 팔았다. 사랑을 넘겨주고 받은 돈이 이 집을 마련하는 데 쓰이고도 남았으니 나는 사랑을 잃고도 그 사랑 덕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련하다. 그럼에도 내가 그 사랑을 어렴풋 기억해낼 수 있었던 건 글을 업으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작은 기억의 조각 하나라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던 습관이 마지막으로 남은 정말 작은 조각 하나를 놓지 않고 끝끝내 버티고 있었던 거라고. 나는 그 순간 감사했다. 내 자신에게.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손길에 쓸려나가지 않은 나의 기억 속 연인에게. 그렇게 나는 2년간 모든 것을 까맣게 지워버린 채 살았지만 기억의 조각을 하나씩 되찾고 있는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지만 오히려 더욱 홀가분하다. 아직 은혜는 명목상으로는 나의 약혼녀이지만 부모님도 그녀도 포기했음이 분명하기에 아마 이 집에 찾아오지 않는 것일 테다. 그리고 나는 지금 기분이 꽤 좋은 상태이다. 아까 말했듯이 얼마 전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으니까. 첫 조각을 손에 쥐었던 그 날부터 나는 내 연인을 부르고자 했지만 부르지 못해서 괴로워했다. 목을 틀어쥐고 머리를 싸매도 그 달콤하고 아릿한 사랑을 지칭할 단어가 없으니 그대로 주저앉아 애처럼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적절한 단어 하나가 기억나지 않아 몇날 며칠을 골몰하는 소설가처럼 나는 이름을 부르지 못해 괴로워했고, 그의 이름을 기억해낸 날 나는 정말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서럽게 울어버렸다.
 
제이.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그의 이름을 부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말려올라가고, 심장부터 손끝까지 따뜻한 온기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눈과 코끝에 열이 몰리고 찡한 기분이 든다. 이름만 불러도 그는 이렇게 안타깝고 가슴 저리다. 제이야. 나는 다시 네 이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내가 얻은 기억의 조각들을 또다시 놓치지 않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직 책을 읽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이 가슴 저미는 이야기가 작가 본인의 이야기임을 알지 못하고 그저 원숭이처럼 나를 찬미한다. 제이야. 보고 있니. 이 이야기는 나 혼자 만든 게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만든 이야기야. 그러니 제이야, 제이야. 너는 어디에 있니. 내가 어디로 가야 너를 찾을 수 있겠니. 안경을 벗고 양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다. 눈이 뻑뻑하다. 그러고 보니 먹지도 않고 잠도 거의 자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잠을 자면 흐릿하게 곳곳이 지워진 제이가 나를 부른다. 분명 행복했는데 일어나면 산산조각난 유리 화분처럼 군데군데만 남아있는 기억이 괴로워 잠들고 싶지 않아진다. 조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대신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면 정신이 다시 또렷해질 것 같았다.
 
찬물이 얼굴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 손으로는 더듬거리며 수건을 잡아 얼굴의 물기를 닦고, 한 손으로는 거울 한쪽을 더듬어 찬장을 연다. 찬장조차 앞면이 거울로 되어 있어 찬장 문을 열면 거울과 거울이 45도 정도로 비스듬하게 마주보게 된다. 가끔 그 사이로 끝없는 공간이 펼쳐질 때가 있다. 엘리베이터의 마주보는 거울처럼 말이다. 다만 45도의 각도는 그 끝이 거울의 끝에서 잘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무한대가 아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한 손으로는 찬장의 약통을 찾아 쥐고, 눈으로는 하지 말라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는 아이처럼 거울 속 공간에 시선을 둔다. 그러면 그 안에는 내 얼굴이 끝없이 존재하게 되고 나를 관찰하는 내가 보이며 눈을 깜박일 때 함께 깜박이는 수백 개의 눈이 있으며 그 끝 잘려 보이지 않는 끝에는
 
… 제이가 있다.
 
“제이야. 제이,”
 
제이야. 다급하게 이름을 부르며 찬장을 붙잡아 닫자 거울 속 공간이 사라짐과 동시에 남는 것은 내 얼굴 뿐이다. 눈을 크게 뜬 채 무언가를 애타게 찾는 한민우가. 이랬던 적이 전에도 있었나? 조금 한심한 느낌에 내 얼굴을 보며 나는 웃었다. 하하. 하. 하. 하. 하하하. 하하. 하하하. 네가 얼마나 그리우면 내가 이런 환상을 볼까. 제이야. 내일은 또다시 너를 찾으러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긴 한숨을 내쉬며 수건을 다시 걸어놓고 약통에서 하얀 알약 두 알을 꺼냈다. 수면제다. 의사는 한 알만 먹으라고 강조했지만 나는 늘 두 알을 먹는다. 한 알만으로는 약효가 돌지 않기 때문이다. 두 알을 손에 쥐고 주방으로 걸어가 컵에 물을 따르고, 두 알을 먼저 털어넣은 후 연이어 물을 마시면 쓴 약이 식도를 가끔 스치지만 안전하게 목 뒤로 약이 넘어간다. 그러면 나는 조금 안심이 된다. 수면제를 처방받고 나서는 꿈을 꾸고 나서도 조금 멍할 뿐 괴로움이 덜해진다. 물컵을 내려놓고 느릿이 슬리퍼를 끌면서 침대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조만간 이사를 가야겠다. 이 집은 아무리 생각해도 프라이버시를 심하게 침해한다. 가끔은 탁 트인 공간이 아니라 사방이 막힌 안락한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생각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줄 콘크리트 벽이 말이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면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사. 이사라…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
 
방은 두 개가 좋겠지. 아무래도.
왜?
너도, 나도 사방이 막힌 안락한 공간이 필요할 때가 있을 거 아냐. 글을 쓰니까.
그래. 그건 동의해. 그래도 잘 때는 같이 자야 해. 이건 지켜.
그 약속 누가 더 안 지키는지 보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모로 누운 몸뚱이에 스며든 또다른 기억.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구나. 제이야. 무겁게 감겨가는 눈에도 불구하고 입꼬리는 말려올라가 파르르 떨린다. 그래. 이 잠에서 깨어나면 이 곳에서 나와 너와 내가 살던 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눈을 감은 너머는 어둠이지만 조금씩 너와 내가 살던 그 곳이 검은 도화지 위에 그려지기 시작한다. 느리지만 조금씩. 수면제를 두 알 먹은 것이 다행이다. 아마 오늘도 이 도화지가 다 채워질 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껏 찾아낸 너와의 행복한 기억 조각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웃으면서.
 
 
 
 
한민우의 명의로 된 집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몇장 떼어온 종이들을 손에 쥐고 낡은 문 앞에 선 나는 아주 잠시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심호흡을 몇 번 했다. 기억나지 않는 기억의 그늘 속 우리는, 너는, 이 집은 원래 네 명의였다. 제이. 그러나 네가 나를 떠난 후, 내가 기억을 빼앗긴 후 이 집은 네가 아니라 내 명의가 되어 있었다. 너는 이렇게 잔인한 행동을 했다. 구태여 네 흔적을 지워버린 이유가 뭐야, 제이. 제발 이 집 안에만큼은 너의 흔적이 조금 더 남아있기를 바라며 나는 받아온 예비 열쇠로 현관문을 열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집 안에 햇볕을 타고 먼지가 느릿하게 부유한다. 잔기침을 참으며 문을 닫고 온전히 안으로 들어왔다. 신발은 벗지 않은 채였다. 이미 바닥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만큼이나 너와 내가 이 집을 오래 비웠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벽을 짚으며 느린 속도로 거실에 걸어갔다. 현관 복도를 조금 걸어 거실에 도착한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수북하게 먼지가 쌓여 사람의 형체도 조금 희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거울이었다. 아니, 거울이 아니라 거울’들’이었다. 벽거울, 전신거울, 작은 탁상용 거울들이 무리지어 벽을 메우고 있었다. 거실에 온전히 들어서자 희뿌연 먼지 위에도 나를 담는 거울들이 수두룩했다. 고개를 돌리면 나를 바라보는 거울 속의 내가 있고, 얼굴을 찡그리면 따라서 얼굴을 찡그리는 내가 있다. 그리고 작은 탁상용 거울 속에는 그런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제이가
 
제이가 있다?
 
황급히 뒤를 돌았으나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더구나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니 집 안에는 나 말고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분명 제이를 보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주먹을 쥐었다. 제이야.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조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하하. 어설픈 웃음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또다시 환상을 본 것 같다. 너와 내가 함께했던 공간이라 그런 것이다. 나도 참. 본능적으로 너를 기억해내지 않았는가, 이렇게. 아마 너와 내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제이야. 나는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을 뒤로 한 채 집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네 작업실, 내 작업실, 우리의 침실, 화장실, 주방, 드레스룸까지.
 
“……하하. 하.”
 
제이야. 잔인한 널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토록 나쁜 너를.
 
황량한 제이의 작업실 문 손잡이를 붙잡은 채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제이의 작업실은 처음부터 비어있었던 것처럼 종이 한 조각조차 남아있지 않다. 다 들고 나갔나? 도망갔어? 조금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본다. 칫솔걸이에 걸린 칫솔조차 외로운 혼자다. 헛웃음을 지으며 주방으로 달려갔지만 숟가락도, 젓가락도, 심지어 컵도 하나 뿐이다. 나쁜 놈. 잔인한 놈.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침실 문을 열었지만 베개조차 하나뿐인 침대를 보니 그마저도 쑥 들어가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자기 흔적을 지우고 사라져버렸을까.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했길래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이렇게 사라져버린 거야. 제이야. 제발 대답 좀 해. 제발. 제이야.
 
대체 왜 이렇게 모든걸 챙겨서 떠나버린 거야. 제이야…… 제이야. 제이. 제이.
“어 고.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왜… 나한테 왜…… 왜 떠나……….”
 
목소리 끝이 조금 떨렸다. 기억 속의 집은 분명 여기가 맞았다. 기억 속에서 너와 나는 저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나는 네게 팔베개를 해준 채 깊은 라인이 지워진 말간 눈과 단정한 이마에 입을 맞췄고, 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픽 웃으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 고개를 돌려 화장실을 보면 그 안에선 너와 내가 마주본 채 이를 닦고 있다. 그러다 내가 웃으면 네가 하얀 치약 거품을 입에 잔뜩 묻힌 채 따라 웃지 않았던가. 주방은 또 어떻고. 새벽에 함께 각자 원고를 작업하다가 피곤하면 너나할것없이 주방으로 나와 뜨거운 커피를 타 마시며 서로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했었다. 서로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저 식탁에 마주앉아 말다툼도 했었는데 너는 왜 그 기억들을 모두 가지고 떠나버린 걸까?
 
제이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 기억을 지운 게 잘못이었어? 하지만 믿어줘. 그 기억은 결코 내가 팔고 싶어서 판 게 아니야. 제이야, 알고 있잖아. 내가 너와의 기억을 팔 리가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응? 제이야. 조금, 많이,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결국 침실 문 앞에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또다시 엉엉 울고 싶었다. 나쁜 새끼. 나쁜 놈. 나쁜 년. 이렇게 매몰차게 떠나면 기억을 하나씩 주워 모으는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 어? 이렇게 숨어버리면. 네가 나를 이렇게 미아로 만들면 나는. 나는… 나는…… 터져나오는 울음에 눈가를 손바닥으로 우악스레 비볐다. 손에는 검댕처럼 까만 울음이 묻어나왔다. 까만 울음이. 까만 눈물이?
 
아니, 아무것도 없다. 손바닥은 깨끗하다. 그저 내 눈물이 아른거릴 뿐이다. 그런데…
 
“한민우.”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린다.
 
“한민우.”
 
무릎걸음으로 다급히 거실을 향했다. 이내 비틀거리며 거실 한가운데 일어나 선다. 제이. 제이가 서있다. 제이가 나를 마주보고 있다. 제이가 울고 있다. 깊은 눈에서부터 떨어지는 회검빛 눈물이 보인다. 제이야. 손을 뻗으려 했지만 아슬한 거리를 남기고 닿지 않는다. 다가가도 돼? 제이야. 제이야, 제발. 제발!!!! 그러나 제이는 나의 고함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젓는다. 다가오지 마. 한민우. 거기 서서 내 이야기를 들어. 다가오면 나는 또 도망쳐버릴 테니까. 나는 그 원망스러운 목소리에 결국 따를 수밖에 없다. 한민우. 왜 여기로 돌아왔어? 비교적 차분한 물음에 나는 처음부터 말문이 막혔다. 왜냐니. 너를 찾으러 왔어. 여기 오면 너를 찾을 단서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여기에 왔어. 여기에 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기억해낸 거야? 네가 여기 살던 그 때를? 제이야. 날 아직 미워하고 있어? 내가 미워? 나는 널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게 아냐. 나는 기억을 판 게 아니라 뺏긴 거야. 나한테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런 소중한 기억인데 그걸 내가 왜 팔아. 어? 왜 팔겠냐고. 팔 리가 없잖아!! 울컥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답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고요하다. 우스운 일이다. 왜지? 난 이렇게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데 왜? 왜기는. 나는 항상 널 보고 있었으니까. 널 항상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항상 네 곁에 있었으니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내 곁에 있었다고? 날 보고 있었다고? 날 항상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내가 널 알아보지 못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너를 알아볼 수 있는데, 이렇게 너를 기억하는데 왜 나한테 말을 걸지 않았어? 원망스러운 목소리가 날을 세운 채 튀어나간다. 그러나 나를 보는 제이가 웃는다. 피식. 웃는다. 웃으며 그 새까맣고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거울처럼 나를 그 안에 담는다. 그리고 말한다. 아직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구나. 한민우. 아니면 또 제자리걸음을 하는 거야? 도돌이표처럼?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네 부모님은, 그리고 네 약혼녀는 이 사실을 알면 또 어떤 생각을 하며 절망하게 될까. 응? 한민우. 그 생각은 좀 해봤어? 아니지, 할 겨를이 없었겠지. 너는 사랑에 빠져 네 몸 하나 수면에 띄우기도 벅찼을 테니까. 한민우. 최연소 신춘문예 당선 베스트셀러 소설가. 그리고 제이. 기껏해야 네 책 판매 부수의 삼 분의 일도 안 될 삼류 연애소설 작가. 어떻게 작가 둘이 만나서 이렇게 서로를 잡아먹을 만큼 사랑을 했을까. 어? 한민우. 기억 나? 기억의 조각이 하나씩 빛을 내고 있잖아. 이제 너도 곧 기억해낼 거잖아. 아니야. 나는. 너는. 너도 나 사랑하잖아. 사랑하잖아? 사랑하지? 제이야. 우리 여기서 행복했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 너.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네가 나한테……
 
“너를 아직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를? 코웃음을 친 제이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새까만 머리가 나머지 얼굴을 반쯤 덮는다. 사랑하는데. 너를.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묘하게 서글프고 또 천갈래로 갈라지는 느낌이 들면서도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익숙했다. 그리고 그 모순을 깨달은 순간.
 
제이가 웃으며 나에게 말한다.
 
“나를 아직도 이렇게 사랑하는 거겠지. 한민우.”
 
움직이는 것은 제이의 입.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는 한민우의 목소리. 어째서?
 
제이의 목소리는 어땠지? 제이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었지? 제이의 키는 어느 정도였지? 제이는 왼손잡이였나? 제이는 오른손잡이였나? 제이는 뭘 좋아했지? 제이는 뭘 싫어했더라? 제이는 어디에서 태어났지? 제이는 어디에서 살고 있었지? 제이는 어느 지역에서 어느 학교를 다녔지? 제이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지? 제이는 어떻게 나를 만났지? 나의 목소리는 어땠지? 나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었지? 내 키는 어느 정도였지? 나는 왼손잡이였나? 나는 오른손잡이였나? 나는 뭘 좋아했지? 나는 뭘 싫어했더라? 나는 어디서 태어났지? 나는 어디에서 살고 있었지? 나는 어느 지역에서 어느 학교를 다녔지? 나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지?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만났지?
 
 
 
 







한민우. 너는 네 자신을 너무 사랑했던 거야. 

자기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 자신에게 또 하나의 이름을 붙여줬던 거지.

자기 스스로를 또 하나의 연인으로 정당화 시키면서.


행복했어?

난 네가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슬픈 영화 말고, 재밌는 영화를 보다가도 문득 내 생각이 나서 펑펑 울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 당신이 아주 괴롭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우리가 흥얼거렸던 그 노래 때문에, 내가 보고 싶어서 가슴을 치고 괴로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너는 내가 없어도 잘 지내야 하고. 그러면서도 아주 많이 슬퍼해야 하겠지.

그건 행복한 걸까, 슬픈 걸까. 한민우. 어떻게 생각해? 

분명한 건, 적어도 누군가는 너와 내 기억을 진짜 연인의 기억이라고 떠올려 줄 거야.

그 모든 진짜같은 거짓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어줄 테니까.



M FOR SALE

MEMORY FOR SALE



FIN.




 




하루만, 또 하루만 다시 널 볼 수만 있다면 

더 멀리, 더 깊이, 날 데려가 줘, 날 이끌어 줘



실 종 느 와 르 M

오 대 영 x 길 수 현

W .  준 희








그런데 제임스. 그거 무슨 약이야?”

 


 약을 털어넣던 수현의 손이 불현듯 입 근처에서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수현이 제 옆에 선 대영을 보았으나 정작 말을 꺼낸 장본인은 이쪽을 보지도 않은 채 사건 현장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잖아. 보아하니 그거 시도때도 없이 먹는 것 같던데. 또다시 툭하니 말을 뱉어낸 대영이 블루종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두어 발짝 앞으로 걸어가 폴리스 라인 바로 앞에 섰다. 여전히 대영은 수현을 돌아보지 않았고, 그것은 일부러 그를 외면한다기보다는 흘려 말하듯 일상적인 행동이었다. 툭하니 던진 말이었지만 수현이 시시때때로 물도 없이 약을 챙겨 먹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원체 남 신경 안 쓰고 멋대로 약을 먹긴 했지만 제게 직접 말을 꺼낼 정도로 그의 앞에서 약을 많이 먹었던가, 싶어 수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블루종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꺼내 폴리스 라인을 걷어 안으로 들어가려던 대영이 문득 자리에 멈춰서서 수현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그저 눈으로 지켜보던 수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저를 돌아본 대영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디 뭐, 아프기라도 해?”

“……?”
제임스, 그거 먹기 전마다 이마를 짚고 있잖아. 두통 오는 것마냥.”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아무리 그냥 두통약이래도 그렇게 자주 먹으면 몸에 안 좋아. 거 알만한 사람이 말이야, 자꾸 그렇게 약 먹어버릇 하고. ? 제임스. 하고 씩 웃어보인 대영이 수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하고 덧붙인 목소리에는 장난이 잔뜩 어려 있다. 잠시 눈을 깜박이며 제 눈 앞의 대영을 바라보기만 하던 수현이, 한 박자 정도 늦게 그를 따라 나직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오 형사님께 걱정도 다 받아 보네요. 제가. 그래도 별 거 아니니까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내가 다 예상하고 있었다고.”

 


 일부러 떨떠름한 표정을 한 대영이 부러 장난스레 손을 튕기며 수현을 가리키고, 이내 다시금 씩 웃으며 다시 몸을 사건 현장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 손을 흔들며 느릿이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말이지,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은 거야. 어디가 아픈지는 내가 직접 말해줄 때까지 안 물어볼 생각인데, 그러니까 병원을 가든지 약을 좀 줄이든지 해 보라고.”

 


오케이? 그의 말을 들으며 수현이 제 양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암페타민 약통이 손 안에 자연스레 들어온다. 대영은 어느새 폴리스 라인을 넘어 현장을 지키던 경찰들과 함께 사건 현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은 거야. 방금 전 대영이 건넨 목소리가 에코처럼 귓가를 희미하게 울렸다. 그래서 문제인 거겠죠. 수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리곤 눈을 감았다. 여전히 두통은 사라지지 않은 채 뭉근하게 제 머리를 짓눌렀다. 이제 이정도 두통은 아무렇지도 않아 약을 먹지 않았지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켓 주머니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몸을 떨었고 눈을 뜬 수현이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서준이었다.

 


, 서준 씨. 지금 곧 가보겠습니다. 위치 문자로 전송해주세요.”

 


 짧은 통화를 끝낸 후 수현이 다시금 사건 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대영은 현장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종종 경찰에게 말을 건네기도 하면서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그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은 채 그저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현이 몸을 돌려 주차해둔 자신의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걱정이라니, 제게 있어선 오히려 생소하고 두통을 배가시키는 단어가 아니던가. 운전석에 올라탄 수현은 미련없이 시동을 걸어 사건 현장을 나섰다. 굳이 그에게 먼저 간다고 알릴 필요는 없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뒷걸음질 치는 건가. 운전대를 잡은 수현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오대영. 그는 다분히 제 두통을 증폭시키는 남자였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

 

 

 

 새벽까지 사건 마무리를 지은 후, 서준은 퇴근도 하지 못한 채 소파에서 막 잠든 참이었다. 힘들기도 했겠지. 요 며칠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노트북 앞에 붙어 있었을 테니. 밤낮으로 돌아다닌 건 자신과 수현이었지만 적어도 저는 이런 상황에 제법 익숙했던 터라 나름대로 버틸만 했다. 수현도 아마 비슷할까, 그래도 명색이 FBI였다고 하니까. 주방에 가서 스틱을 뜯고 컵 두 개에 제법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아메리카노 두 잔을 탄 대영이 힐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만 깨어 있나, 제임스 이 사람은 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혀선…… 작게 중얼거리던 대영이 모락모락 김이 퍼지는 머그컵 두 잔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그와 제 사이가 요즘들어 그닥 좋지 않다는 것을. 먼저 피한 것도 다름아닌 본인이었으니 할 말은 다 했지 싶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피해다니다 특수실종전담반으로 복귀했을지…… , 짧게 숨을 내쉰 대영이 괜히 제 머리를 헤집었다. 꼴사납게 피하기나 하고 말이야. 나이도 먹을만치 먹은 아저씨가. 이렇게 저 자신을 질책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형사 생활 하다 보면 동료들, 다른 사람들, 심지어 상사들하고도 심심찮게 마찰이 일어나곤 하는데 왜 길수현하고 빚은 마찰에 저는 먼저 피해버렸냐 이 말이다. 복잡한 마음에 얼굴을 찡그린 대영이 될대로 되라지, 작게 중얼거리며 양 손에 컵을 들었다.

 

 계단에 올라서자 대영의 무게에 희미하게 삐걱이는 소리가 울린다. 일정한 소리와 함께 다시금 대영은 생각에 잠겼다. 며칠간은 눈을 감을 때마다 저를 노려보는 수현의 시선이 느껴졌다. 분노에, 그리고 울분에 가득찬 시선이 저를 향할 때마다 대영은 이상하게도 가슴 한 켠에 그대로 비수를 꽂는 것만 같은 잔인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었냐고? 그걸 알았으면 그가 그렇게 덜컥 휴직계를 냈을까. 저도 모르니 그저 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쉰다는 명목으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 때마다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길수현의 모습이 생생하게 눈 앞에 펼쳐졌다는 것이다. 그 표정이, 일그러진 그 얼굴이, 울고 있는 그 눈이…… 붉게 물든 그, 눈이. 그렇게 잠에서 깨곤 했다. 쉬는 동안, 그리고 서로 돌아가 출근하는 동안 한 번도 그를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어느새 굳게 닫힌 문 앞에 도착한 대영이 문 옆 선반 위에 잔을 올려놓고 문을 두드렸다.

 


제임스. 자나?”

 


 부러 낮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진짜 자나…… 뻘쭘한 표정을 지으며 닫힌 문만 하릴없이 바라보던 대영이 두어 번 헛기침을 하며 한쪽 귀를 문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고요해야 할 문 너머에서는 침묵 대신 낮은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 안 자는 건가? 아니면 TV를 보다 잠들기라도 한 걸까. 잠시 고민하던 대영은 결국 빈 손으로 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당연하게도 잠기지 않은 문고리가 제대로 돌아가며 문이 열렸지만, 이상하게도 쉽게 문을 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거 참,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새벽이라 그런가. 괜히 크게 심호흡을 하며 문고리를 꽉 잡은 대영이 겨우 제가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문을 밀어 공간을 만들었다.

 


“……?”

 


 지직거리는 노이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창백하게 푸른 잡음으로 방 안을 비추는 TV. 그리고 창문도 열어두지 않아 방 안을 가득 메운 지독한 양주 냄새. 들어가자마자 자신에게 훅, 끼쳐드는 알코올 향에 본능적으로 얼굴을 찡그린 대영이 주변을 둘러보았고, 이내 어렵지 않게 수현을 찾을 수 있었다.

 





“… 길수현.”

 


 검은 가죽 의자, 그 위에 무릎을 모아 웅크려 앉은 한 남자. 고개를 돌려 반쯤 숙이고 있었지만 분명 길수현이었다. , 믿을 수 없다는 듯 짧게 숨을 내뱉은 대영이 잔을 서랍에 대충 올려놓은 채 급히 수현에게 다가갔고, 그의 앞에 서서 손을 뻗은 순간 훅하고 끼쳐드는 알코올 냄새에 다시금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대체 무슨. 뭐 하는 거야? 제임스? 술 마셨어? 담요를 어깨에 두른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주변을 돌아보던 대영의 시선 안에 들어온 것은 협탁 위 갈빛 액체 속 얼음이 거의 다 녹아 물이 맺힌 크리스탈 잔, 그리고 엎어진 채 제 몸 안의 흰 알약을 모조리 밖으로 쏟아낸 작은 약통. 분명 수현이 언제나 들고 다니며 입 안에 털어넣었던 그 약이었다. 대영이 손을 올리고 그에게 말을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현은 아무런 답이 없다. 그저 제 앞에 아무도 없다는 듯 양 무릎에 고개를 파묻어버렸을 뿐이다. 그런 그의 정수리를 한 번 내려다본 대영이, 아주 조심스레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약통에 손끝이 닿는 그 순간.

 


“… 오 형사님.”

 


 끊어질 듯 희미하지만 분명 그의 목소리였다. 언제나처럼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오늘따라 유독, 늘어나버린 테이프처럼 바닥으로 가라앉는 듯한 느낌은 아마 그가 마신 양주 때문일까. 왜 갑자기 안 하던 술을 마셔서. 사람 속상하게. … 왜 속상하지? 그러나 그 답을 찾기도 전에 다시금 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만약만약에, 말입니다.”

 


 발음은 제법 또렷했지만 느리게 계속되는 말은 그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제임스. 만약에 왜. 저도 모르게 조금 다급하게 대답한 대영이 그를 일으켜 세우려 협탁에 뻗었던 팔을 수현의 쪽으로 돌렸다. 우선 그를 침대에 눕히는 게 우선일 듯 싶었다. 제가 보기에도 수현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무리 당분간 사건이 없을 거라지만 대체 왜 이렇게 혼자서 뭘 많이 마셔서. 그러나 그의 행동은, 이어진 수현의 말에 그대로 멈춰지고 말았다.

 


“…… 오 형사님의 선택이 옳은 게 아니었다면요.”

“……”

그러면…”

 


 저를, 걱정해주지 않으실 겁니까? 느리고 희미한 목소리가 노이즈로 가득찬 방 안을 울렸다. 제임스, 하고 부르려던 대영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유독 지금의 상황과, 그리고 그의 모습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아니…… 아니, 어쩌면 그가 지금 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크기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꺼내놓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심정.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꺼낼 수 없었던 솔직한 심정일까. 대영이 침묵을 지킨 채 여전히 고개를 숙인 수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브라운 톤의 체크무늬 담요를 조금 더 여며줄 뿐, 어떠한 답도 하지 않은 채. 그러자 움츠리듯 어깨를 늘어트리며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낸 수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었다. 제게서 멀어지실 거고, 특수실종전담반에 또다시 나오지 않으실 거고더 이상 제 눈 앞에 보이지 않겠죠. 그렇게, 영영 볼 수 없게 될 거고요. 걱정을 받을 수도 없겠죠. 마치 어린애 투정처럼 수현은 떨리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었다. 감은 눈 안쪽이 문득 뜨거웠다.

 


걱정, 해주지 마세요.”

“……”

“…… 걱정해주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그런 사람이 생길 때마다, 머리가 아파요. 아파서죽을 것 같습니다. 오 형사님. 정말, 이대로 모두 다 조각나서 죽어버릴 것 같다구요그런 사람이 생기고, 사라지는, 그 과정이, 제 머리를 짓눌러요. 암페타민으로도 아픔이 가시질 않아요. 알고 계십니까? 오 형사님종래에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목소리가 떨렸다. 듣는 사람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던 대영이, 복잡미묘한 표정을 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또다시 둘 사이에는 노이즈만이 감돌았고, 결국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수현이었다. 팔걸이를 붙잡은 채 바닥에 발을 딛은 수현이 어깨에 담요를 걸친 채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오래 앉아있던 탓인지 혹은 술을 과하게 마신 탓인지 쉽게 몸을 가누질 못했다. 제임스, 한숨을 내쉰 대영이 수현의 어깨를 고쳐 잡고 단단히 일으켜 세웠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흐느적이는 몸이, 여전히 온전히 들지 못해 가려진 얼굴과 흐트러진 머리칼이 오히려 안쓰러웠다.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대영이 입술을 달싹이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수현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대체 너는 여기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제임스. 작게 중얼이며 다시 주저앉을 듯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수현을 품에 안듯 부축한 대영이 그대로 수현을 침대로 옮겨 눕혔다. 침대에 눕혀질 때까지 수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이불을 덮어준 대영이 작은 한숨과 함께 침대맡에 걸터앉았다.

 


“… 제임.”

 


 언뜻 보이는, 부드럽게 흩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옆얼굴이 창백했다. 감은 눈은 찡그린 것 같기도 했고 그저 평온히 눈을 감은 것 같기도 했다. 고르게 숨을 내쉬는 듯 들썩이는 어깨를 바라보며 대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생각도 정리할 수 없었다. 생각의 조각이, 그 모든 단상이 바닥에 흩뿌려져 정리조차 할 수 없게 퍼져버린 듯 했다. 1층에 두고 온 담배가 절실했다.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된 것도, 그래, 그 날 이후였지. 죽지 말아야 할 아이가 죽은 날. 이 사람이 자신을 원망하는 눈초리를 보내던 날. 그 날은 대영 자신에게 있어서 아무래도 여러 의미로 떨쳐버리고 싶은 날이자 나쁜 의미의 터닝포인트가 된 것이 분명했다. , 하고 바람 빠지듯 헛웃음을 지은 대영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돌려 수현을 다시 시선 안에 담았다. 이름을 부름에도 답이 없는 것을 보아 이제는 진짜 잠이 든 듯 했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 못박힌 것처럼 앉아 잠든 수현의 옆얼굴만을 바라보며 대영이 느릿이 눈을 껌벅였다.

 


“… 길수현.”

 


 나는, 모르겠다. 모르겠어. 길수현. 네 아픔이 어떤지, 얼마나 큰 고통인지. 대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네가 그런 고통을 떠안게 된 건지모르겠다고. 그래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좋을지도 나는 짐작할 수가 없다. 그만두는 게 나을지, 그대로 서있는 게 나을지, 혹은……

 

 대영이 고개를 돌려 시계를, 그리고 창문 밖을 차례로 보았다. 새벽 세 시. 그리고 어둡기만 한 새벽 하늘. 별조차 떠있지 않아 마치 검은 그림자가 창 밖을 그대로 뒤덮은 것 같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제 머리속처럼 그저 시꺼먼 어둠이었다. 이상하게도 대영 자신이 그리도 사랑하는 아내조차 지금 이 순간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떠오르는 것이 죄책감이 들 만큼 기묘한 순간이었다. 왜일까. 길수현. 너는 답을 알고 있을까. 묻고 싶었지만 또다시 삼킨 말이 새벽의 어둠에 묻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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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했었던 많은 계절은

비록 여기서 끝이 난다 해도

 

실 종 느 와 르 M

반 효 정 x 진 서 준

W .  준 희

 







 

 효정아. 서준이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었다. 엄지손가락이 이미 낡아버린 사진을 또다시 훑었다. 사실은 사진이라 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다이어리 사이에 끼워져 구겨진 종이였다. 잊었다 생각했고, 잊으려 했던 기억이었다. 하지만 어느 하나도 잊혀지지 않은 기억이었다. 또다시 울컥하니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서준은 눈을 감았다. 입술을 짓씹듯 깨물었다. 눈을 감으면 효정이 피를 토하며 눈을 감는 순간이 그려졌고, 눈을 뜨면 효정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응시해야만 했다. 그 사실은 너무나도 끔찍해서 서준은 가끔 창문을 타고 넘어와 부서지는 햇볕마저도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아무도 너를 몰랐을까, 효정아. 왜 누구도 너를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을까. 효정아. 왜 나는 너를 다시 돌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효정아, 효정아. 차마 꺼두지 못한 모니터에는 여전히 CCTV에 찍힌 효정의 옆모습이 그대로 띄워져 있었다. HOME. 서준과 효정을 이어주던 단 하나의 실이었다. 서준은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 … 네가 부끄러웠던 게 아니야.”

 


 네가 두려웠던 것도 아니야, 효정아. 떨리지만 담담한 목소리가 고해성사를 하듯 느리게 흘러나왔다. 서준은 그렇게 효정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찾아올 줄 몰랐으니까. 너는너는, 내 과거였으니까. 과거였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너를 돌아보면 내가 다시 과거로 빨려들어갈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웠던 거야. 우습지만 그랬어. 서준은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바보같지. 효정아. 목소리 역시 입꼬리처럼, 조금 더 떨렸다. 고개를 기울인 서준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이내 반 박자 느리게 다시 모니터로 올렸다. 여전히 모니터 속의 효정은 무언가에 쫓기듯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여기 한 번만 봐주면…… 좋겠다. 서준이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시야는 희뿌옇게 일렁이고 있었다.

 

 효정아. 알고 있어? 넌 그 지옥같던 시궁창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어. 알아. 그때의 우리는 결코 진창 속에서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 수 없을 정도로 온 몸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너는 반짝거렸기 때문에 홈에는 그렇게 하나둘 사람이 모였던 거야. 서준이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박였다. , 하는 소리와 함께 펼쳐둔 다이어리 내지 위에 눈물이 얼룩졌다.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결코 자신은 본 적 없던 어느 날의 효정이 스쳐 지나갔다. 홈의 아지트, 누구도 떠나지 않는 그 곳 안에서 그제서야 모든 두려움을 뒤로 한 채 밝게 웃는 아이들, 그 안에서 누구보다도 더 환하게 웃으며 제가 가족으로 맞이한 아이들을 보듬는, . 반효정. 어린 나이에 스스로 아이들을 제 품 안에 감싸려 했던, 사실은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던 열 아홉의 소녀. 그리고 결국 제가 하려던 일 하나 제대로 꽃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진 스물 하나의, 내 소중한. … 소중한….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손이 떨렸다. 서준은 한 손으로 우악스레 제 눈을 부볐다. 그래도 살지. 조금만 더 버텨서 살지. 그래서, 네가 추천서 써준 홈의 아이들이 쉼터에 들어가는 모습을 네 두 눈으로 직접 봤어야지. 효정아.

 

 효정이 죽었다는 사실을 슬퍼하기도 전에, 홈의 아이들은 경찰서로 끌려가 이것저것 조사를 받아야 했다. 다만 수현이 제 일처럼 아이들을 도와준 덕도 있었고, 더 이상 아이들을 과거로 돌려보내지 않겠다는 효정의 다짐처럼 꼬투리를 잡힐 만큼 나쁜 일을 한 아이들이 없었기에 참고인 조사라는 명목의 취조는 다행히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끝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 홈의 아이들은 동우, 아니, 박사와 시인, 그리고 맘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아지트를 떠났다. 아이들의 임시 거처는 대영이 손을 써 마련해 주었다. 임시 거처라고 해 봐야 대영이 아는 보육원의 여원장이 아이들의 향후 거처가 마련될 때까지 잠시나마 공간을 내어주기로 약속한 것이었지만, 갈 곳이 사라진 아이들은 기꺼이 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아이들이 영원히 그 곳에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준이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다시금 눈가를 꾹, 누른 서준이 가는 숨을 토해내었다. 이번에는 서준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였다.

 

나 너한테 미안하다는 말도 못 했어.

널 오해하기만 했단 말이야.

 

 서준은 원래 자리에 사진을 다시 끼워놓은 채 다이어리를 덮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목걸이를 제 목에 걸었다. 효정이 그녀에게 주었던, 여느 펜던트 대신 그 열쇠가 흔들리는 목걸이였다. 열쇠를 잠시 손 안에 꼭 쥐며 시선을 내리깔던 서준이, 이내 손을 내려 책상 위의 녹이 슨 상자를 양 손으로 집어들었다. 나 때문에 변하고자 한 너였잖아, 효정아. 그러니까 네가 하려던 일의 마무리는, 내가 지을게. 보고 있어? 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다시금 톡,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에 떨어진 눈물에 상자가 가볍게 몸을 진동했다. 그 상자를 소중히 품에 안은 서준이, 몸을 돌려 모니터 안의 효정을 등졌다.

 


“…… 효정아.”

 


 모니터를 등진 채 서준이 나지막이 이름을 되뇌였다.

 


“…… 미안해.”

 


 그러니까, 쉬고 있어. 효정아.

 


“…… 보고 싶다….”

 


 떨리는 목소리 뒤에 지은 웃음은 이미 눈물에 젖어 흐리게 반짝이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제와서, 더이상 들을 수 없는 본인에게 미안하다 전한다 해서 그것이 정말 전해지기는 하는 것인지. 이것도 결국에는 다 자기만족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들리지도 않고 전해지지도 않을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소리내어 말하는 것은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듣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을 것 역시 알기 때문에. 그 날, 너를 모질게 외면했던 나였던 만큼, 이제는 그만큼 스스로 돌려받기 위해. 속죄인 걸까? 서준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속죄라 하면 속죄일 테지만. 서준은 상자를 품에 안은 채 방을 나섰다. 오랜 시간 한 화면만을 띄우고 있던 모니터도 홀로 남자 결국 까맣게 눈을 감았다. 


감정. 속죄라 하기에는 복잡했고, 미안함이라 하기에는 가벼웠다. 

어떤 날에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을 감정이었으니 어떤 말로도 완연히 표현되지 않을 테다.

그러니 혹자는 그 감정을, 차라리 그리움이라 표현할 것이다. 




헤어짐이 있으면 만남도 있다지만
짧은 이별일지라도 나는 못내 서럽습니다
내 주머니 속에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큰 하나
이미 버스는 끊기고 돌아갈 길 멉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걸어서 그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대의 마음으로 갈 수 있는 토큰 하나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부르튼 발은 상관도 않을 겁니다

이정하, 진작부터 비는 내리고 있었습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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